▲ 송옥주 국회 환경노동위원장과 한국노총 제조연대,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 공동 주최로 2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기업변동시 근로관계 승계 입법토론회. <정기훈 기자>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거래처 요청에 응대하라는 원청 지시에 근무 외 시간은 물론이고 휴일에도 ‘노예’처럼 일했어요.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놀러갔다가 거래처 연락을 받고 불려 나가기도 했죠. 수직적 업무지시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조를 만들었더니 곧이어 회사 폐업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하이트 생맥주기계 설치·유지·보수·관리업무를 21년째 해 온 정병상(50)씨는 5년 전쯤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놀러갔다가 거래처 업무 전화를 받고 군말 없이 출근한 경험을 떠올리며 울먹거렸다. 하이트진로 하청업체 서해인사이트에 소속된 정씨는 지난해 10월30일 노조설립에 참여했다. 원청 직원의 부당한 지시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 노조를 설립했지만 지난달 업체 폐업으로 이달 1일 해고됐다.

용역업체 변경을 포함해 합병·영업양도·회사분할 같은 기업변동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노동조건 저하나 단체협약이 무력화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고용승계와 노동조건 보호를 법으로 의무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당이 지난 총선에서 사업이전시 근로관계 승계 제도화를 공약한 만큼 21대 국회에서 입법 논의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고용승계 협약 체결해도 이행 여부 불안감 지속

서해인사이트노조에 따르면 하이트진로와 새 도급계약을 맺은 하청업체는 ‘노조와 협상할 의무가 없다’며 교섭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원청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서해인사이트 노동자들은 원청이 고용승계 책임을 져야 한다며 서울 서초구 하이트진로 서초동사옥 앞 농성을 이어 오고 있다.

서해인사이트 노동자들만의 일은 아니다. 지난해 6월 포스코 구내운송 사내하청업체 성암산업에서 일하던 노동자 145명은 성암산업이 운송작업권을 원청사 포스코에 반납한 뒤 이 작업권이 5개 협력사에 분할되면서 ‘집단해고’ 사태가 벌어졌다. 성암산업 노동자들은 노숙농성과 단식 끝에 같은해 7월18일에야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중재로 ‘2021년 8월1일까지 1개사로 통합한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하며 봉합된 상태다.

오비맥주 경인직매장 노동자들도 같은해 6월 도급업체 변경 과정에서 선별적 고용승계로 20여명이 사실상 해고됐다. 오비맥주 경인직매장 노동자들은 중부지방고용노동청 부천지청과 정치권이 나서며 ‘결원 발생시 우선 고용’하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정부나 정치권 개입 없이 하청노동자의 고용승계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용역업체 변경시 고용승계를 의무화하는 규정을 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영업양도시 근로관계가 판례상 원칙적으로 승계될 뿐이다. 고용승계를 강제할 법적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협약이 체결됐더라도 제대로 이행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은 지속되고 있다. 박옥경 성암산업노조 위원장은 “이달 중순 문성현 위원장이 다시 한번 협약 이행 확약을 받은 상황”이라면서도 “6월1일 협약 이행을 위해 각 협력사 사장단이 포함된 TF를 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용역업체 변경 과정에서 해고된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의 농성도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관련 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송옥주 의원 4월 법안 발의

여당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송옥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과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전국노동위원회·노동존중실천 국회의원단이 한국노총 제조연대와 함께 19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업변동시 근로관계 승계 입법토론회’를 열었다. 송옥주 위원장은 지난해 11월 말 한국노총 제조연대와  ‘사업이전(변경)시 노동관계 승계 법률 제정을 위한 협약’을 맺었다. 4월 중순께 관련 법안을 발의할 계획이다. 송옥주 의원실 관계자는 “입법 초안이 나온 상황이고 현재 검토 단계에 있다”며 “검토를 마무리하는 대로 발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토론회에서는 기업변동을 포괄하는 법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권오성 성신여대 교수(법학)는 “기업은 일부 사업부문을 분리해 자회사로 만들거나 이를 다른 회사에 이전하는 방식으로 회사분할이나 분할합병을 취할 수도 있고 영업 일부양도의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며 “기업이 일방적으로 정한 법형식에 근로관계 승계 등에 관한 서로 다른 효과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근로관계 승계를 희망하지 않는 근로자에게 거부권을, 근로관계 승계 대상에서 제외된 근로자에게 이의신청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나의 회사가 두 개 이상으로 분리될 때 노동자가 분리된 기업부문 중 어느 쪽에 소속될 것인지 선택권을 줘야 한다는 의미다.

정부가 입법 ‘공백’을 메우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주문도 이어졌다. 이에 대해 권기섭 고용노동부 노동정책실장은 “사내하도급 근로자 고용안정 및 근로조건 보호 가이드라인을 지난해 말 개정했는데 지도·권고의 효과가 있었는지에 대해 (평가하기에는) 아직 불분명한 상황”이라며 “입법론으로 해결하기 전 가이드라인 지도·권고를 통해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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