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한민족문화대전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김천해(金天海)는 울산 동구 방어진에서 1898년에 태어났다. 본명은 김학의다. 그곳은 조선 말까지 인구가 겨우 100여명도 되지 않았던 바닷가 마을이었다. 그런데 1900년 초, 일본인 어부들이 들어와 집단 거주를 시작한 계획된 어업기지로 변모했다. 김천해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성장한 어린 시절 집 주변을 활보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김천해의 동지들은 옆 마을 일산진 청년들이었다. 성세빈·박학규·천호문·장병준 등과 의기투합했다. 그들은 일본인들의 횡포와 국권 침탈에 분개했다. 더구나 윗세대에서 설립한 근대식 사립학교는 1910년 일제 당국이 시행한 ‘사립학교령’으로 강제 폐교되기까지 했다. 분통을 삭이던 청년들을 각성시킨 것은 1919년 3·1 만세운동이었다. 청년들 중 연장자였던 성세빈이 앞장서 1920년 민족교육을 펼칠 학교 재건에 나서 ‘보성학교(普成學校)’을 세운다.

울산에서 교사로 활동하다 일본으로 건너가다

김천해는 보성학교에서 노동야학을 이끌다 1922년 사립학교 설립인가를 받을 무렵 첫 번째 학교 선생님이 된다. 보성학교는 사립학교·노동야학·여성야학을 함께 운영한 교육기관일 뿐 아니라 울산 동구의 항일운동을 이끄는 터전이었다.

학생들은 적호(赤虎)소년단에 가입했고, 청년들은 오월청년동맹에 들어갔다. 붉은 호랑이를 뜻하는 소년단과 5월1일에 창립했다고 그렇게 이름을 정한 청년회는 사회주의 사상이 깃들었음을 보여준다. 좀 더 윗세대는 신간회 울산지회, 사상단체인 북풍회와 정우회, 신문사 지국, 울산노동조합, 방어진혁명노동자회 등 사회단체와 항일운동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김천해는 보성학교의 기초를 만든 후 1922년 일본으로 떠난다. 일본대 사회대에 입학했는데 학문적인 욕구보다 사상단체 일월회와 가나가와노동조합 활동에 더 열정을 쏟았다. “조선이 독립하려면 일본의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한다.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일본인 노동자와 결속해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이 시기에 굳혔다.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과 재일본조선인노동총동맹

김천해가 노동운동에 적극 뛰어들 무렵 엄청난 노동자 학살사건이 두 차례나 벌어졌다. 1922년 7월 일본 니가타현 시나노강(江) 발전소 건설현장에서 100여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학살됐다. 신에츠전력주식회사가 약 600여명의 조선인을 썼는데, 극심한 강제노역을 못 견뎌 도망친 이들을 총살했다. 시신은 그대로 강에 버렸기 때문에 하류에서 발견돼 사회적 사건으로 커졌다. 이때 ‘재일본 조선노동자 상황조사위원회’가 결성됐는데 김천해는 조사위원을 맡았고, 그 뒤 도쿄조선노동동맹 실행위원까지 맡게 됐다.

1923년 9월에는 더 큰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9월1일 일본 관동지역 수도 도쿄 외곽에 진도 7.9 이상 규모로 지진이 발생하자 일본 정부는 흉흉해지는 민심을 잡을 모략으로 조선인과 사회주의 세력에 화살을 돌렸다. 최소 2천명에서 최대 6천명의 조선인들이 학살당했는데 그중 다수가 최하층 노동자였다. 관동대지진 때 김천해도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면했는데, 곧바로 ‘지진피해동포위문단’을 만들어 조선인들을 구호하고 희생자 조사를 펼쳤다. 더 나아가 일본에서 노동하는 조선인들을 규합한 최대의 조직, 재일조선인노동총동맹(재일노총)을 결성하는 선두에 서게 된다. 재일노총은 일본 내 조선인 노동조합 단체 10개가 통합한 조직으로 1925년 2월 출범한다.

혈육 서진문의 고문사와 감옥살이의 시작

김천해는 1926년 재일노총 소속 관동조선노동조합연합회 위원장이자 조선노동청년동맹 지도자로 활동의 폭을 넓혔다. 하지만 같은 12월 일제의 내선일체 융화정책에 찬동해 강연회와 공연을 펼치는 친일파들을 같은 조선인들이 난입해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일본 경찰은 그 배후에 김천해가 있다고 지목해 체포했고 이때 첫 감옥살이를 겪는다.

그 뒤 1928년 5월 재일노총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지도자로 정점을 찍고, 6월에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책임비서에 취임했으니 일본 경찰이 만든 최우선 감시 대상에 올랐다. 결국 같은해 10월25일 김천해는 가나가와노동조합 요코하마지부에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체포된다. 모두 36명이 체포된 중대사건으로, 경찰은 체포 이유를 일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을 앞둔 습격첩보라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 일왕 히로히토를 향한 테러를 준비한 게 아니라, 조선인단체·사회주의세력을 솎아 내려고 거짓 죄명을 씌운 것으로 보인다.

함께 체포된 동지 중에는 사촌 동생 서진문(1900~1928)이 있었는데 고문을 심하게 받았다. 그리고 아픈 몸을 치료받지 못했고 단식을 하며 항거했다. 김천해와 서진문은 울산 동구에서 함께 일본으로 넘어온 때부터 둘도 없이 가까운 동지였다. 결국 서진문은 체포된 뒤 3주가 지난 11월16일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수레에 실려 풀려났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무산계급해방만세! 얼른 이군(李君)을 구원하라! 나는 벌써 살아나지 못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했으니 사실상 감옥에서 죽은 옥사(獄死)며 고문사(拷問死)였다.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조선인 혁명가

김천해는 사촌동생 서진문이 유골이 돼 고향으로 떠날 때 배웅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재일노총의 최고 지도자고, 일본공산당에서도 중요 지위에 올라 있어 보석이 불가능했다. 그 후 긴 재판 과정을 거쳐 징역 5년의 판결을 선고받았는데 실제 수감기간은 8년에 이른다.

김천해가 감옥과 법정에서 투쟁을 하는 동안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Profintern)은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을 일본공산당에 통합하고 재일노총을 해소해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일본전협)에 흡수하기로 결정한다. 내부 반발이 컸다. 최대 3만5천여명이 모였던 재일노총은 사라지고, 일본전협 조선인위원회는 2천600여명 규모로 격감해 출발했으니 뼈아픈 결과다.

김천해가 담장 너머 소식을 접할 때 감옥 안에서는 전향공작이 한창 벌어졌다. 일본 공안당국은 체포한 일본공산당원에게 형량 감산을 거래하며 전향자를 늘려 왔다. 그중 일본공산당을 대표해 코민테른 집행위원까지 맡았던 사노 마나부를 비롯해 나베야마 사다치카 등 대부분이 전향한다. 김천해도 눈앞에 들이미는 전향서를 받았다. 그는 끝까지 단 한 번도 변절하지 않은 대표적인 공산당원으로 꼽히게 된다.

김천해는 1935년 출소했지만 겨우 1년도 안 되는 시간 활동하다 또다시 체포된다. 한글로 제작된 ‘조선신문’을 창간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약해진 조직을 되살리기 시작하자 일본 경찰은 체포의 올가미를 다시 씌웠다.

김천해는 1936년에 체포된 뒤 1937년 재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일제는 1941년 3월 치안유지법을 개정해 공산주의에서 전향하지 않으면 만기를 채워도 석방하지 않고 예방구금으로 바뀌게 만들었다. 그 대표사례가 김천해다. 후추형무소에서 형량을 다 채웠지만, 예방구금제도에 따라 1942년 9월 도쿄 토요타마감옥예방구금소로 보내졌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 조선인 단체와 일본공산당이 ‘정치범석방 촉진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미군정이 치안유지법을 폐지한 후인 그해 10월10일이 돼서야 풀려났다. 각각 8년씩 두 번의 긴 수감생활을 비롯해 총합 17년의 감옥살이가 여기서 끝났다.
 

▲ 일본인 사학자 히구치 유이치의 김천해 평전 표지.(2014)

재일본조선인연맹 결성과 이념대립 그리고 월북

김천해는 함께 출소한 비전향자 6인과 함께 일본공산당 확대강화위원회를 조직해 패전 직후 일본 사회주의운동을 이끌었다. 일본공산당 중앙위원과 조선인부장으로 선출됐고,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중앙위원으로 뽑혔다. 그리고 1946년 10월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조총련의 전신) 명예의장이자 고문으로 취임한다.

이 시기 1923년에 수감돼 22년 만에 풀려난 박열(1902~1974)이 조련에서 빠져나가 신조선건설동맹 위원장에 취임하고 이후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민단) 초대 단장이 된다. 1920년 초반 한때 같은 사회주의 조직에 있었던 두 사람의 운명이 갈리는 시기다.

감옥에서 전향서를 쓴 박열은 대중운동과 당운동을 한결같이 이끈 김천해와 비교가 됐다. 결국 아나키스트였던 과거를 버리고 재일조선인들 중 친일·부역자들과 손을 잡았다. 김천해가 사회주의 계열을, 박열이 우익 계열을 대표할 때 일본 조선인사회는 이념으로 충돌한 사건이 계속 벌어졌다. 그중에는 민단 단원이 김천해 암살시도를 할 때 박열이 묵인했다는 의심을 받는 사건도 있다.

박열은 고국으로 돌아가 이승만 지지와 합작을 선언했지만, 김천해는 1950년 한국전쟁 직전까지 일본에 남았다. 그리고 전쟁을 얼마 안 남기고 밀항선을 타고 바로 월북한다. 친일 청산도 하지 못하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연이은 민중학살을 벌인 남쪽과 등을 지고 북을 선택한 것은 한반도가 겪은 비운의 역사와 겹친다.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존경하고 연구하는 김천해

더구나 김천해는 북한에서 승승장구만 하지 않았다. 두 차례 훈장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1960년대 말 숙청명단에 올랐고 1970년대 초에는 사상범 수용소에 있다는 것을 앰네스티가 확인해 줬다. 숙청당한 이유와 과정을 내밀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그 시기가 김일성이 후계자로 김정일을 선택하고 세습을 위한 환경을 구축할 때라 어렴풋하게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결국 일본 재일조선인 역사 속 가장 유명하고 일본인들에게까지 존경을 받았던 혁명가, 김천해는 그렇게 잊혀 갔다. 2년 전 <김천해-재일조선인 사회운동가의 생애>(2014)를 쓴 일본인 사학자 히구치 유이치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김천해의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해 존경을 표했다. 우리는 김천해를 잘 알지 못한다. 국가보훈은 월북으로 아예 불가능하고 학계의 연구도 턱없이 적다. 그저 후대 일본인이 평전을 써서 그 생애를 전달하는 현실이 헛헛할 뿐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