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나는 글을 쓸 때 제목부터 적고 시작하는 습관이 있다. 첫 단어·문장·문단에 연연하는 특성 때문이다. 일상에서의 태도는 모양새가 되든 말든 일단 저지르고 보자인데, 글을 쓸 때면 유독 첫머리에 집착한다. 어쨌든 글 제목은 오래전에 정했다. 벌써 3개월은 된 듯하다. 미리 정한 제목은 ‘임금을 동결하자’이다. 한데 나는 제목을 비운 상태로 글을 시작한다. 글을 시작한 이 순간에도 내면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해서다. 글을 구상한 순간부터 쓸까 말까 갈등했다. 쓰고 나면 욕을 험악하게 얻어먹고 가슴앓이할 것 같아서였다.

세상 사람 모두 “예” 할 때 홀로 “아니요” 한다는 신화가 있다. 군계일학 용기다.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청소년 시절에 대개 한번쯤 상상한 꿈이다. 나도 그랬다. 참 멋질 것 같았다. 그런데 보니까, 세상 사람 모두가 “예” 하는 상황은 없었다. 민족·종교·권력·이념 따위로 갈라져서 제각각 “예” “아니요” 다른 소리를 냈다. 실제 세상에는 없는 그림이었다. 그 상황의 축소판이 있을 따름이다. 그건 하나의 집단 안에서 벌어진다. 한 집단에서 모두 “예” 할 때 홀로 “아니요” 하는 상황이 그렇다. 그 상황은 멋지다는 차원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왕따가 되고 이단이 되기도 하는 외로운 길이다. 왕조시대면 사약 받고 현실 사회주의에서는 숙청당하는 일이다. 한국 노동운동에서 임금동결을 대놓고 주장하는 일이 바로 그런 차원이다. 자본의 앞잡이로 취급받기 딱 좋은 행위다.

서설이 길었다. 그만큼 쫄았다는 것으로 이해해 달라. 이제 본론이다. 임금동결을 생각한 핵심 근거는 ‘노동 내 불평등 심화’다. 산업·지역·정파를 가리지 않고 모든 노동운동가가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코로나19의 위기가 비정규직·하청노동·특수고용 등 밑바닥으로 집중되고 있다고 말한다. 구구절절 사연과 통계를 나열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 노동운동만이 아니라 온 사회가 다 안다. 밑바닥은 해고, 무급휴직, 일거리 축소 등으로 소득이 대폭 줄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박사의 분석에 의하면 상위 10%와 하위 10% 소득 격차는 2014년 5.00배에서 2019년 5.39배까지 벌어진 상태다. 그걸로도 암담한데, 코로나19가 격차를 더 벌리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임금이 인상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겠는가. 밑바닥 노동은 임금을 인상할 수 없다. 일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임금인상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결국 임금을 인상할 수 있는 곳은 상위 30% 안에 들어 있는 노동이다. 지불능력이 있는 회사나 공공기관 소속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같은 계급이라는 노동자끼리의 임금 격차가 기어코 6배를 넘어서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 상황이 두렵다. 임금을 동결하자는 제목을 결심한 배경이다.

알음알음 운을 떼 봤다. 욕먹을 일 없는 사석이라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의외였다. 상당수 노동운동가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중 일정수가 동의를 표했다. 한데 꼬리표 하나가 붙었다. 임금을 동결하면 재벌만 좋은 것 아니냐고 했다. 나의 고민은 노와 사의 이해득실이 아니라 노동계급 내부의 심각한 불평등 문제인데, 반대할 이들의 꼬리표가 되겠구나 싶어 나도 꼬리표를 달았다. 임금을 동결하는 대신 그만큼의 금액을 받아 내서 사회연대기금을 조성하고 그 기금으로 코로나19에 일자리를 잃고 신음하는 밑바닥 노동자를 지원하면 어떻겠냐고 말이다.

한국 노동조합을 압도하는 흐름은 기·승·전·임금인상이다. 나를 포함한 87세대 노동운동가들이 만든 오류다. 저 사업장은 저만큼이나 받는데 너희는 이 임금으로 뭐 하고 있냐, 라면서 노조를 임금 비교 운동으로 몰아간 탓이다. 기업별 노조 체계를 핑계로 노동계급이 상하로 분단되는 수렁에 무능했던 탓이다. 그러면서 노동운동은 ‘하나의 계급을 유지하기 위한 임금 조율’이라는 주요 임무를 외면했다. 그 결과 노동계급이 중심부 노동과 주변부 노동의 두 계층으로 분단된 것이다.

코로나19 위기대응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가 시작됐다. 민주노총이 참여하면서 노·사·정 3자가 다 참여했다.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할 때, 추상적 수준의 합의든 좀 더 세부적 합의든 이번에는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코로나19 위기에서 노동측에 절박한 것은 총고용 유지와 사회안전망 강화다. 반드시 따내야 한다. 거기에다 노동계가 먼저 공격적 방어로 임금인상 자제를 제시하면 어떨까 싶다. 경총과 대한상의가 총고용 유지를 담보할 수 없듯 양대 노총이 임금인상 자제를 담보할 수는 없다. 사업장별로 벌어지는 일을 강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총고용 유지와 임금인상 자제를 합의하는 것은 사회의 흐름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코로나19 위기에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계층은 비정규직·하청노동·특수고용직 등 밑바닥 주변부 노동이다. 지금 양대 노총이 몰두해서 봐야 할 계층은 중심부 정규직 노동이 아니다.

글을 쓰는 시간이 다른 글에 비해 족히 두 배는 더 걸렸다. 쓰면서도 갈등했다. 읽는 이에 따라서는 다 쓴 것 아니냐고 느낄 수 있을 텐데, 자기검열 하며 꽤 순화했다. 결국 ‘임금을 동결하자’라는 제목을 달지 못하고 나는 글을 마친다. 담당 기자에게 글을 보내고 귀가한 뒤에 막걸리 한잔 기울이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룰 것 같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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