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논란에 대한 김지형 전 대법관의 의견이다. 국내법을 개정한 뒤 미비준 ILO 핵심협약(8개 중 4개)을 비준하자는 '선 입법 후 비준'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ILO 187개국 중 11개국만 핵심협약 4개 이하 비준
김지형 전 대법관 "비준 이후 할 일 논의하자"


서울지방변호사회와 노동법연구소 해밀(소장 김지형 변호사)은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 대강당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방안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대법관을 지낸 김지형 변호사는 기조연설에서 "ILO 87호·98호 협약은 우리 헌법에 정한 노동 3권의 다른 표현이고 특별한 것이기에 비준해야 한다"며 "정의에 대해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하는 것은 정의를 부정하는 것이고 ILO 핵심협약 비준을 미루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고 단언했다.

1991년 ILO에 가입한 우리나라는 핵심협약 8개 중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협약(87호)·단결권 및 단체교섭 협약(98호)·강제노동 협약(29호)·강제노동 철폐 협약(105호) 등 4개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ILO에 따르면 가입국 187개국 중 8개 핵심협약을 모두 비준한 나라는 144개국이다. 핵심협약 중 4개 이하를 비준한 나라는 11개국에 불과하다. 한국이 여기에 속한다.

김지형 변호사는 "핵심협약을 비준하는 일이 최소한으로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심히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비준 시기에 대한 논쟁보다는 비준 이후에 할 일을 논의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 입법 후 비준을 주장하는 진영을 설득하기 위해 절충안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그는 "비준을 먼저 하자는 입장(진영)에서는 ILO 권고에 따라 국내법 개정이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 답을 줘야 서로 조율이 가능할 것 같다"며 "비준 이후 국내법 개정이 공정하고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것임을 상호 확약하는 사회적 타협을 하고 이를 전제로 비준 절차를 밟아 나가자고 해 보자"고 제안했다.

한국에서 불거진 핵심협약 비준방법 논쟁을 ILO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코린 바르가(Corinne Vargha) ILO 국제노동기준국장은 이날 심포지엄 영상발제에서 "법제가 완벽해지고 모든 이해당사자가 만족할 때까지 비준을 미룬다면 (노동권 보호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관행의) 진전은 더욱 지체될 것"이라며 "국제노동기준은 협약 비준과 발효 사이에 1년 유예기간을 인정하고 있고 각국은 이행 약속을 분명히 하면서도 복잡하고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 최종적인 수정을 하도록 충분한 시간을 보장받는다"고 설명했다. 정부와 국회가 비준 약속을 하고 국내법 개정절차를 밟아 나가도 된다는 의미다.

"정부가 국회에 비준동의안 제출하거나 ILO에 비준서 기탁해야"

최은배 변호사(법무법인 엘케이비앤파트너스)는 첫 발제에서 핵심협약 비준을 가로막는 현행 제도로 불거진 노동권 침해사례를 분석했다. 고용노동부의 단체협약 시정 관련 행정지침, 공공기관 단체협약 시정명령, 쟁의행위에 대한 업무방해죄 적용, 교사·공무원 결사의 자유 침해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선 입법 후 비준이라는 명제에 빠져 정부가 할 수 있는 비준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논의에 부친 탓에 경영계의 반노동조합적 의사의 늪에 빠져 비준절차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 의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선 비준을 위해 정부는 어떤 절차를 밟으면 될까. 윤애림 서울대 고용복지법센터 연구위원은 두 번째 발제에서 "정부는 더 이상 경사노위와 국회로 책임을 떠넘길 것이 아니라 ILO 결사의 자유 협약 비준을 위한 실천을 해야 한다"며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거나 ILO에 비준서를 기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비준 절차를 밟으려는 정부의 행위는 노동 3권 실현을 위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작업의 실질적 첫 단추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신인수 변호사(법무법인 여는)·김근주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이동우 국가인권위원회 사무관·최종연 변호사(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 위원)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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