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혹자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정권과 자본이 노동개악을 하기 위해 만든 국가 기구”라 주장하는데, 이런 식으로 국가 기구를 바라본다면 노동개악을 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국가 기구가 과연 어떤 게 있는지 궁금하다. 청와대 앞 광장에서 대통령에게 담판을 요구하는데, 대통령과 그를 보좌하는 청와대 참모진은 노동개악을 위한 국가 기구가 아닌가? 기획재정부 장관이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면담도 요구하는데, 이들 부처 역시 노동개악을 위한 국가 기구가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정부부처가 노동개악을 하기 위한 국가 기구에 다름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애써 무시하는 사실이 있다. 민주노총은 수십 개가 넘는 국가 기구에 이미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국가 기구는 그 모두가 노동자를 위한 것이라 참여를 용인하는 것일까. 노사 간 분쟁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노동위원회는 어떤가. 그 결정들이 다 노동자를 위한 것이라서 참여를 허용하는가. 최저임금위원회는 어떤가. 노동의 요구율이 잘 반영되니 참여하는 것인가. 국제노동기구(ILO) 참여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수준의 총노동과 총자본 입장에서 볼 때 ILO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 같은 국제금융기구들에 비해 주변부로 밀려나 개발도상국에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엔 기구에 불과하다. 이토록 무력한 국제기구에 사사건건 제소하고 해마다 총회에 참여하려는 이유는 뭔가.

노사정 3자주의(tripartism)에 근거한 국가 기구 결정은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 게 수두룩하다. 하지만 민주화의 결과로 혹은 그 영향으로 출범한 이들 기구에서 협의와 교섭의 주체로 '조직 노동'의 참여가 가능하게 됐다. 노동이 참여하지 않으면 자본과 국가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에서 국가 기구의 결정을 내리게 되겠지만, 노동이 참여함으로써 자본과 국가가 결탁한 일방적 결정을 저지하거나 그 속도를 늦출 가능성이 커진다. 이러한 사회적 공간과 정치적 기회를 통해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혹은 노동자들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향으로) 국가 기구에 관여하려는 것이다.

"노동시간과 임금 유연화를 추진하는 문재인 정부"의 경사노위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참여하지 않으면, 유연화를 추진하는 정부의 흐름이 저절로 멈추는가. 국회로 넘어가면 더 잘 막을 수 있나? 경사노위에서 법률적 구속력을 갖고 만날 수 있는 부처 장관들을 임의적인 틀에서 따로 만나 이야기하면 유연화가 더 잘 제어되는가? 청와대를 찾아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따지면 더 잘될까?

경사노위 참여를 부정하는 논리라면 정부 부처와의 노정 교섭을 전면 부정해야 일관될 것이나, 사정은 반대다. 경사노위 참여를 부정할수록 정부와의 교섭이나 장관과의 만남에 매달린다. 그런데 말이 '교섭'이지 그 실상은 간담회다. 법률적 구속력이 없기에 무슨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제도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제도개선이 중요한 이유는 그 성과가 체제 개혁으로 이어지면서 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만이 아니라 2천만 노동계급 전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의적 노정 교섭은 정책 건의 수준에서 끝나고 장관이 바뀌거나 정권이 바뀌면 협의나 합의의 지속성도 사라져 버린다. 여러 극한투쟁들의 성과도 마찬가지다.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투쟁이 치열하게 일어났어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제도개선으로 이어진 게 없다. 투쟁이 처절하게 지속돼 마무리돼도 그 결과는 투쟁 당사자에 한정될 뿐 사회 전반과 계급 전체로 확산되지 못한다.

노동존중을 공약한 문재인 정부가 '노동개악 종합 패키지'를 추진하고 있다면, 그 저지 투쟁전선은 어디가 돼야 할까? 총파업 깃발이 휘날리는 거리가 돼야 할까?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가 풍찬노숙 투쟁을 하면 문재인 정부가 알아서 굴복하고 '노동개악 종합 패키지'를 포기할까? 무엇보다 대기업 정규직 조합원들은 총파업에 앞장서 동참할까. 착취 체제의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비정규직들은, 최저임금조차 못 받는 저임 노동자들은 생계를 뒤로 미루고 총파업에 가열차게 동참할까. 조합원 다수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면 '뻥파업'이 되고, 소수만 앞장서는 투쟁을 총파업이라 우기는 '뻥쟁이'가 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노동운동의 정치적 위신과 사회적 권위는 회복 불능 상태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1년 전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에서 드러난 현장 조합원들의 압도적 민심은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에 과감하게 나서라는 것이었다. 민주노총 직선제를 '직접민주주의'로, 또 '조합원총회'로 치켜세운 주장도 있었는데(물론 필자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총회'로 모인 조합원의 70%가 사회적 대화를 지지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합원의 대중적 결정을 확인하려 했던 지난해 10월의 민주노총 정책대의원대회는 창피스럽게도 성원 부족으로 무산됐다. 1월 말 민주노총은 다시 한 번 대의원대회를 통해 사회적 대화의 마당으로 과감하게 나서라는 '조합원총회'의 결정을 확인하려 하고 있다.

경사노위가 조직 노동을 체제 내로 포섭하려는 자본과 국가의 기제라는 분석을 굳이 거부하지 않는다. 이를 다른 식으로 해석하면 조직 노동의 힘이 체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만큼 커졌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급 타협의 산물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정 수준에서 이뤄지고 있는 노동조합 조직에 대한 인정, 단체교섭에 대한 인정, 종업원 경영참여, 사회복지 체제의 확산 등이 그렇다. 민주노총이 이미 참여하고 있는 수십 개 국가 기구도 같은 성격이다. 제대로 된 노동운동이라면 체제에 자그마한 틈이라도 보이면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한다. 체제 밖으로 겉돌아서는 체제를 바꿀 수 없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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