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국제노동기구(ILO) 창립 100주년이다. 100주년에 앞서 한국이 기본협약을 비준하고, ILO 총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하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ILO 기본협약을 비준하겠다고 공약했고, 노동존중 사회의 실현이라는 항목으로 국정과제에도 넣었다. 총회 연설은 가능할지 모르나 기본협약을 비준할 수 있을지와 관련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만만찮다. 여당은 먼저 법률을 정비하고 나서 비준하자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법 개정이 쉽지 않은 일이고, 여당 정치력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가 선 입법이 아니라 선 비준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글을 보내왔다. 4차례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글 싣는 순서
① ILO 협약 87호, 비준 좌절 가능성 크다
② '부당노동행위 금지' 조약인 ILO 협약 98호
③ 비준권은 대통령에, 국회는 동의권만
④ 노동운동, 비준 요구 전면에 내세워야

국제 조약은 대체로 헌법과 관례에서 비준이 먼저고 입법이 나중인데, 노동에 유리한 조약만 예외다. 자본에 유리한 조약은 비준→입법 순인데, 노동에 유리한 조약은 입법→비준 순이다. 이 때문에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87호(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와 98호(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 적용에 관한 협약)는 1991년 ILO 가입 이후 김영삼(1993~1997)·김대중(1998~2002)·노무현(2003~2007) 정부까지 15년의 민주정부 집권기를 연속 경과하면서도 비준에 실패했다.

노동자 착취와 억압의 ‘입법 완성기’

선입법론자 다수는 비준 자체에 반대한다기보다 입법을 빙자해 비준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입법 자체를 방해하려는 자들이다. 이들은 ‘후 비준’을 입증할 법률적 근거가 궁색해지자, ‘입법 형성기-입법 완성기’ 이론을 개발해 냈다. 세계를 ‘입법 형성기’ 국가와 ‘입법 완성기’ 국가로 나누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입법 형성기 국가는 선 비준 경로를 밟았고, 유럽과 북미의 입법 완성기 국가는 선 입법 경로를 밟았다고 거짓말한다. 이 이론은 한국이 입법 완성기 국가이므로 입법을 하지 않으면 비준이 불가능하다는 궤변으로 이어진다. 87호 협약과 관련해서 영국도, 독일도, 일본도 선 비준 경로를 밟았다.

대한민국은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측면에서 입법 완성기 국가지만, 노동자 권리를 보장하는 측면에선 입법 형성기에 머물고 있다. 판사·검사·변호사·법학자 등 법률가들의 노동자 권리 이해 수준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파업시 대체근로(파업 파괴자)를 허용하고 부당노동행위 주체를 노동조합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등 노동기본권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이들이 행정부·입법부·사법부에 차고 넘친다.

소수지만 노동자를 위한 입법을 하고 싶어 하는 선입법론자도 있다. 이들의 관심사는 노동자를 임금 노예로 취급하는 대한민국의 후진적 법률을 국제 사회 상식 수준으로 개혁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바라는 바는 ILO 협약이 갖는 정치적 측면, 법률적 측면, 운동적 측면을 고루 봐 줬으면 하는 점이다. 이행과 실천을 위해서는 비준과 입법의 울타리를 벗어난 노동계급의 의식적 각성과 운동적 동원이 수반돼야 한다. 노동운동은 ILO 협약 문제를 ‘법률’과 ‘국제’라는 실무적 틀을 넘어 정치와 제도라는 운동적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선 비준 주장의 요체는, 비준이 입법보다 앞서야 한다는 순서 자체에 있기보다 노동운동 입장에서 ILO 협약이 법률을 넘어 정치적이고 운동적인 문제라는 데 있다.

ILO 협약이라고 쓰지만, 협약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ILO 조약으로 읽어야 한다. ILO 협약은 유엔이 제정한 세계인권선언 같은 국제조약의 일종이다. 이는 ILO 협약을 다룰 때 법률적 의미를 넘어 정치적 의미에 주목해야 함을 뜻한다. 노동조합에게 정치적 의미란 바로 운동적 의미와 동전의 양면이다. ILO 협약이 갖고 있는 세 가지 측면, 즉 법률적 측면·정치적 측면·운동적 측면을 고루 반영한 균형 잡힌 접근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 노동운동은 ILO 협약의 법률적 측면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그에 비례해 ILO 협약이 갖는 정치적 측면과 운동적 측면은 경시되고 있다. 이는 노동법 개폐를 통한 입법이 이뤄져야 비준이 가능하거나 비준하는 의미가 있다고 믿는 전술적 오류를 낳고 있다.

ILO 협약의 정치성과 운동성

노동운동에 ILO 협약 비준이 중요한 이유는 악법을 개폐하는 목적 이상으로, ILO 협약이 갖는 정치적 운동적 의미 때문이다. 정치적 의미는 자본가와 유산자에게만 차별적으로 보장되는 자유를 노동자와 민중에게도 보편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이며, 운동적 의미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성과가 조직 노동 10%에만 겨우 나눠지는 현 체제의 제약을 혁파해 미조직 90%는 물론 모든 국민이 우리 헌법이 보장한 권리와 이익을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사회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변혁운동으로 나가는 데 있다.

문재인 정부 2년차 정세를 살펴보면 비준 전망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정부와 여당이 비준은 고사하고 입법할 의지가 부족하다는 신호는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비준 의지가 있는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 혼자뿐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국회는 여소야대 상황이고, 비준동의와 입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외교통일위원회·환경노동위원회·법제사법위원회는 극우 자유한국당이 장악하고 있다. ‘촛불’ 이전의 극우세력이 똬리를 튼 국회를 통한 입법의 현실성과 더불어 비준 문제가 노동기본권에 대한 대중의 의식을 각성시키고 노동운동의 투쟁을 촉진하는 정치적·운동적 측면을 포괄해야 한다는 실천적 고민이 필요하다.

이러한 정세를 고려해 한국 노동운동은 ILO 기본협약 비준 투쟁에 적극 나서야 한다. ILO 기본협약의 내용이 무엇인지, 이것이 왜 중요한지 대국민 홍보와 조합원 교육사업을 강화해야 한다. 노동권에서 일어나는 헌법과 하위 법령의 충돌 상황을 국민과 조합원에게 알리고, 비준 투쟁에 대한 이해와 동의를 끌어내야 한다. 교원노조나 공무원노조 등 공공부문 노조는 투쟁 전선을 87호와 98호 협약 너머로 확장해 151호(공공부문 단결권 보호 및 고용조건 결정을 위한 절차에 관한 협약) 비준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기본협약 비준을 목표로 하는 ILO 공대위를 여성·청년·비정규직 노동단체와 시민사회와 함께 폭넓게 조직해야 한다. 미조직 90% 문제 해결에 연대하는 시민사회가 캠페인을 주도하고, 노동운동은 단체행동·사회적 대화·정책 참가를 통해 투쟁 동력을 보태는 양 날개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

‘원 포인트’ 투쟁

미국 노동운동의 잘못을 반복하면 안 된다. 1948년 8월27일 미국 상원은 87호 협약에 대한 동의를 요청받았다. 하지만 7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87호 협약 동의안은 상원 외교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혹자는 자본과 국가의 반대를 이유로 보지만 필자는 미국 노동운동의 전술적 오류, 즉 ‘선 입법-후 비준’ 입장이 더 큰 문제라 본다.

11월 예정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총파업과 노동자대회는 ‘원 포인트’, 즉 ILO 기본협약 비준에 투쟁 화력을 집중할 것을 제안한다. 87호와 98호 협약은 비준과 입법에서는 출발점인 ‘기본’의 성격을 갖지만, 올해 말과 내년 초를 관통할 노동운동의 투쟁과 관련해선 모든 의제를 꿰뚫는 ‘핵심’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일관되고 집요한 비준 투쟁을 집중적으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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