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준상 전 KBS 이사

<적과의 거래>(Trading with The Enemy)라는 책이 있다. 부제는 ‘1933~1949년 나치와 미국 사이에 벌어진 돈의 음모’(The Nazi-American Money Plot 1933~1949)다. <뉴욕타임스>에서 필자로 활약한 찰스 하이엄(Charles Higham)이 1995년 반스앤드노블(Barnes&Noble) 출판사에서 낸 책이다. 감정적인 표현 없이 담담하게 묘사한 내용은 충격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 체이스 뱅크, 포드 자동차 등 미국 굴지의 자동차 회사 경영진들이 나치와 엄청난 거래를 했고, 상무부 차관·국무부 차관보·영국 주재 미국 대사·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 등 미국 정부 관리들이 1917년 제정된 적성국교역법(The Trading with the Enemy Act)을 무력화시켜며 이들을 도왔다는 것이다.

2000년 초 근무하던 신문사에서 미국 출장을 갔을 때 뉴욕에서 구입한 이 책이 다시 머리에 떠오른 이유는 짐작하는 것과 같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깡그리 무시한 이들을 상대로 삼성을 비롯한 국내 대기업들이 벌인 행각이 ‘적과의 거래’와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아서다. 삼성을 비롯한 자본은 그들의 행위가 헌정을 유린하는 것일 수 있음에 대해 물음을 던지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 정도로 생각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삼성은 이를 위해 헌정 유린을 기획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 대통령과 많은 관리들은 조력자로 동원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싶다.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으로 3세 세습을 위한 본격적인 거버넌스 재편을 위해 승마를 매개로 삼아 최순실과 대통령에게 접근해 온 국민의 노후자산인 국민연금을 유린하는 판을 기획하고 주도한 장본인이나 마찬가지다. 상식이 범접할 수 없는 사상 초유의 이번 헌정유린 사태는 박근혜·최순실·이재용 게이트이며 그 바탕에는 ‘이재용 세습작전’이 깔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세습작전을 위해 동원된 접근 수단은 승마였고, 최종 목적지는 지난해 7월17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주총일에 국민연금의 찬성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K스포츠재단과 미르재단 설립계획도 삼성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따라서 이들 두 재단에 대기업들이 낸 출연금의 성격도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출연금 780여억원 중 삼성 204억원은 대가성 뇌물이 확실하다. 또한 SK와 롯데가 할당받은 출연금도 면세점 탈락을 만회하기 위한 확실한 대가를 얻기 위해 제공한 대가성 뇌물로 볼 수 있다. 나머지 대기업들이 낸 돈은 삼성이 짠 기획판에서 놀아나며 사실상 ‘삥’을 뜯긴 성격을 지닌다.

물론 이재용 세습작전에서 가장 크게 삥을 뜯긴 건 국민이다. 국민연금은 이재용씨에게 유리한 합병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사금고처럼 동원됐다. 지난해 5월26일 합병 계획이 공시될 때 제일모직-삼성물산의 합병비율은 1대 0.3500885, 기준은 5월22일 종가였다. 이재용씨를 비롯한 이씨 일가는 제일모직의 대주주(지분율 42.2%)였고, 삼성물산에 대해서는 소액주주(지분율 1.4%)였다. 삼성물산 주가가 낮을수록 이씨 일가에겐 유리했다. 그런데 공시 한 달 전인 4월27일 국민연금은 이날 거래량의 74%에 해당하는 65만주를 한꺼번에 내다파는 것을 시작으로 합병 계획 공시 직전까지 삼성물산 주식 167만주, 990억원어치를 팔아 치웠다. 6만원이 넘던 삼성물산 주가는 5만원5천원대로 떨어졌고, 이 가격이 합병 비율의 기준이 된 것은 물론이다. 합병 계획 공시 이후에는 높은 가격에 되레 사들이기 시작했다. 팔 때보다 높은 가격에 사는 것은 물론, 낮은 합병 비율 때문에 삼성물산 주주로선 불리한데도 190만주, 1천300억원어치를 사들여 지분율을 11.2%까지 끌어올렸다. 이렇게 높아진 지분은 합병 찬성에 대한 최대 지원군으로 기능했다.

제일모직에 대해서도 야릇한 행태를 보였다. 지난해 7월8일 국민연금은 제일모직 지분 5.04%를 신규 확보했다고 공시했다. 합병 주총이 열리기 9일 전이다. 이전까지 국민연금은 제일모직의 주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제일모직 주식이 없었으니 삼성물산에 불리한 합병비율로 인해 국민연금이 볼 수 있는 이득은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날 제일모직 주식을 신규 확보하면서 말할 명분이 생겼다. 같은해 11월15일 국민연금공단이 내놓은 해명자료에는 “(합병 찬성은) 국민연금이 보유한 양 사 주식의 평가금액이 비슷하면서 (…) 합병에 따른 시너지 효과 및 주식가치의 상승 여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데 따른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한마디로,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하면 신규 확보한 제일모직 주식의 가격이 떨어져 손해를 입게 되고, 합병에 찬성하면 제일모직 주가가 상승해 이득이 된다는 걸 적어 놓은 것이다.

이쯤 되면 국민연금은 거의 삼성의 쌈짓돈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해서 국민이 입은 손해는 얼마나 될까. 올해 5월 서울고등법원이 판결한 적정한 합병비율(1대 0.414)에 따라 계산해 보면 국민연금공단이 잘못된 합병 비율에 찬성하면서 입은 손해는 공교롭게도 K스포츠재단과 미르재단에 대한 대기업들의 출연금과 비슷한 790여억원이다. 반면 잘못된 합병비율을 통해 이재용 부회장이 거둔 이익은 무려 4천700억원이 넘는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합병비율로 인한 손해만 있을 뿐이다. 그냥 들고만 있어도 6만원이 넘었을 삼성물산 주식을 팔아 치워 5만5천원대까지 끌어내리는 과정에서 입은 손해, 합병 찬성에 동원되기 위해 높은 가격에 삼성물산 주식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입은 손해까지 감안하면 그 규모는 수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거듭 강조하건대, 헌정유린 사태는 '박근혜·최순실·이재용 게이트'로 불러야 한다.



전 KBS 이사 (cjsang21@naver.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