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성전자 제품만을 수리하는 도급업체에서 수리기사로 근무하던 김주민(가명)씨는 며칠 전 일자리를 잃었다. 사장이 “돈 때문에 힘들다”며 폐업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삼성제품을 다루는 또 다른 협력업체로 채용돼 백수신세를 면했지만 김씨는 여기서도 제외됐다. 1년 정도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으로 활동한 김씨에게 새 협력업체 사장은 “나는 너를 채용할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사장이 직원을 채용할 권한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나를 채용할 수 있다는 건가요?”



#2. 삼성제품 수리기사 출신으로는 드물게 협력업체 사장이 된 최민수(가명)씨. 그는 지난 1년 내내 자금압박에 시달렸다. 직원들이 “미지급된 초과근로수당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면서부터다. 직원들은 돈을 안 주면 연장근로시간에 콜(주문)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올해 2월부터 석 달간 개인적으로 돈을 융통해 직원들에게 지급했다. 적자가 났다. 삼성에 불려가 적자가 난 이유를 해명하며 진땀을 뺐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직원들이 이번에는 3년치 초과근로수당에 대한 체불임금 소송에 나서겠다고 했다. 최씨는 폐업을 선택했다.



#3. 삼성전자서비스 지점장 출신으로 삼성제품 수리업체 사장이 된 박장호(가명)씨. 그는 최근 구직사이트에 구직공고를 냈다. 하지만 이는 요식행위일 뿐이다. 직원들을 시켜 며칠 전 폐업한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직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우리 회사로 이직하라”고 권유했다. 밀려오는 고객들의 콜을 감당하려면 수리기사들이 다른 업체로 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둬야 한다. 며칠 뒤 박씨는 이직을 결정한 직원들이 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까지 기다린 뒤 계약서를 회수했다. 사용자 서명란은 빈칸으로 남겨 뒀다.



최근 부산시 동래구의 삼성전자서비스센터와 도급계약을 맺었던 협력업체(GPA-Great Partnership Agency)와 그 직원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다. 이들은 모두 삼성을 위해 근무하지만 법적으로는 사용·종속관계를 찾을 수 없는 남남이다. 17일 민주당 '을지키기 경제민주화추진위원회(을지로위원회)'와 민변 노동위원회·금속노조는 “삼성전자서비스(주)는 전국에 100여개의 전자제품 수리와 판매를 담당하는 서비스센터를 설립해 운영하면서, 외형상 독립업체로 보이는 협력업체(GPA)를 통해 인력을 위장고용했다”고 폭로했다.

을지로위원회 등에 따르면 전국 100여곳에 달하는 삼성전자서비스센터에 6천명에서 1만명으로 추산되는 협력업체 내·외근 서비스기사가 근무 중이다. 이들은 해당 협력업체 사장과 근로계약을 맺고 있다.

문제는 협력업체 사장들이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이른바 ‘바지사장’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이날 공개된 한 GPA 사장의 녹취록에 따르면 협력업체 사장의 역할은 삼성으로부터 지급되는 급여와 비용을 사원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뿐이다.

협력업체 사장 상당수는 삼성전자서비스 임직원 출신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도급계약을 맺은 사장이라고 해도, 삼성과 대등한 지위를 갖기는 어려운 조건이다. 삼성전자서비스(갑)가 협력업체(을)와 체결한 도급계약서를 보면 삼성은 협력업체 직원채용과 교육·평가·징계 등에 있어 사실상 인사권을 행사했다. 일반적인 도급계약 관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경영권 개입도 관행화돼 있었다. 삼성은 각 협력업체를 대상으로 재정과 재고를 포함한 경영전반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고, 심지어 협력업체가 등록한 사무실 임대료까지 대신 지불한 것으로 나타났다.



'을의 눈물' … 사장은 폐업하고, 노동자는 잘리고



이러한 구조 속에서 협력업체에 고용된 서비스기사들은 원청업체인 삼성측 직원들과 동일한 공간에서 섞여 근무했다. 영남권의 한 센터를 보면 1층 삼성디지털프라자 매장, 2층 서비스센터(접수상담파견+GPA사무실+서비스센터), 3층 자재실로 구성돼 있다. 원청업체의 업무지시가 협력업체 직원들에게 적용될 여지가 클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실제 서비스기사들은 삼성 직원으로부터 문자메시지를 통해 업무지시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서비스기사들에 대한 임금도 삼성을 통해 지급됐다. 기사가 서비스를 나가면 모든 수수료는 일단 원청인 삼성으로 입금된다. 그 뒤 삼성이 개별 기사들의 처리건수에 대한 데이터를 집계한 뒤 제품수수료(기사지급분)와 각종 비용을 더해 협력업체 사장에게 보내 주는 식이다. 삼성은 협력업체 직원들의 4대 보험료와 퇴직금도 보전해 줬다.

권영국 변호사(민변 노동위원회)는 “삼성전자서비스와 협력업체는 도급계약을 맺고 있으나, 그 실질을 고려할 때 협력업체는 도급을 위장해 노무대행기관의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삼성과 협력업체 직원들은 묵시적 근로관계에 있거나 최소한 불법파견 관계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비스기사들이 사실상 위장된 도급업체에 고용돼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복잡한 고용구조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초과근로수당 실종, 최저임금 위반"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직원들은 시간당임금이 아닌 건당수수료를 받는다. 일을 하면 할수록 수입이 늘어나는 구조다. 이런 탓에 장시간 노동 관행이 만연해 있다. 지난해 서비스기사 일을 시작한 김주민씨는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10시 넘어 퇴근하기 일쑤다. 이렇게 일하면 전자제품 고장이 많은 여름철 성수기에는 330만원 정도를 번다. 하지만 이 돈이 전부 생활비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근무하면서 지출하는 통신비와 식대, 차량유류비를 빼야 한다. 월급에서 70만~80만원이 쑥 빠져나간다. 비수기 때는 살림이 더욱 팍팍하다. 그는 150만원을 받아 80만원으로 한 달을 난 적도 있다고 토로했다.

시급이 아닌 건당수수료를 기준으로 하는 데다, 초과근무수당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있다. 원청인 삼성이 정한 시간외 수수료 지급기준이 있지만 콜수의 경우 기준시간을 초과한 시간에 대해서만 시간외수당을 인정받는다. 콜을 받기 위해 대기한 시간에 대해서는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다. 전체 급여를 노동시간으로 나누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친다.

17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도 1년 전 시작된 서비스기사들의 “체불된 초과수당을 지급하라”는 작은 외침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은수미 민주당 의원은 “현대차 불법파견 사건처럼 법원이 불법을 인정한 사건조차 ‘누가 진짜 사장인가’를 놓고 소모적인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 사회에서 노동법 보호범위를 벗어난 왜곡된 고용형태가 늘어나고 있다”며 “노동법과 경제법을 통한 동시적 보호방안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 대해 삼성전자서비스 관계자는 “협력업체 110여곳 중 사장이 전직 임원인 경우는 3명뿐”이라며 “독립성을 갖고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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