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18일 고 이소선 어머니가 쓰러지기 전 가족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김동만 한국노총 상임부위원장이었다면,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장기표(66·사진) 대표였다.
장 대표는 “마지막 통화를 하고 두 시간 뒤에 어머니께서 쓰러지셨다”며 “매번 뵐 적마다 저를 걱정하셨는데 마지막까지 염려만 끼쳐 드렸다”고 안타까워했다.
장 대표는 이소선 어머니의 마지막 통화 대상자였지만, 만남 과정에서는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70년 11월13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뒤 가족과 열사의 친구들, 동네사람들을 제외하고 이 여사를 처음 만난 ‘외부인’은 장 대표였다.
당시 학생운동 활동과 관련해 수배 중이었던 25살의 청년 장기표는 열사의 분신소식을 전해 들은 뒤,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소선 어머니를 찾아갔다. 열사의 장례가 치러지기도 전이었다.
열사의 시신이 안치된 명동성모병원 근처 삼일다방에 들어간 장기표는 후배들을 시켜 어머니를 다방으로 모셨다.
“저는 대학생 장기표라고 합니다. 아드님의 뜻을 이어 가고 싶습니다.”
“태일이가 근로기준법 공부하면서 대학생 친구가 없어 어렵다고 그랬는데. 죽어서야 대학생 친구를 만나는구나.”
장기표와 이소선은 앉은 자리에서 3시간을 얘기했다. 어머니는 태몽부터 분신하기 직전까지, 전태일 열사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얘기해 줬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청계피복노조 설립활동으로 이어졌다. 77년 장기표 대표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 이소선 어머니는 “장기표는 죄가 없다”고 검사들에게 소리를 질렀고, 그 일로 구속까지 됐다.
장 대표는 90년대 초 민중당과 2004년 녹색사민당 등 잇따라 진보정당 운동에 나섰지만 실패를 맛봐야 했다. 그럴 때마다 이소선 어머니는 장 대표에 대한 신뢰와 응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장 대표가 긴 세월 옆에서 지켜본 어머니의 삶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것은 사랑을 헌신적으로 실천하면서 터득한 총명함과 지혜였습니다. 고난을 통해 사랑을 얻고, 사랑을 통해 지혜를 얻으셨지요. 그리고 그 지혜를 통해 해방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셨어요.”
그런 어머니에게 장 대표는 “이제는 홀가분하게 떠나셨으면 좋겠다”고 마지막 말을 전했다.
“어머니 장례주간에 보셨잖아요? 어머니와 일면식도 없는 일반 시민들,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이 왔습니까. 그렇게 많은 분들이 어머니의 삶을 기리고 있는 겁니다. 이제는 안심하시고, 그 많은 아들과 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면서 짐을 내려 놓으시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