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KT그룹이 디지털플랫폼기업으로 거듭나겠다면서 계열사를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디스그룹에 매각된 아이디스파워텔(옛 KT파워텔) 노동자들. 2021년 매각 당시 KT파워텔노조(현 아이디스파워텔노조)와 사용자 간 ‘조합원의 신분 변동이 있으면 노조와 협의’하도록 한 단체협약을 맺고 있었음에도 노동자들은 매각에 제동을 걸 수 없었다. 박갑진 아이디스파워텔노조 위원장은 “변호사 등과 협의했지만 경영권이라며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수 있다는 답을 들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서울 종로구 KT광화문사옥에서 매일 아침 시위를 하고, KT그룹 주주총회까지 찾아가 손팻말을 들었지만 소용없었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면서 어느새 기업 간 인수합병과 사업구조 재편은 일상이 됐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탈출 전략으로 대기업 간 ‘빅딜’을 정부가 나서서 추진한 것과는 다르게 단기이익을 노리는 사모펀드의 인수합병이나 산업전환을 명분으로 저성장 부서를 떨궈내려는 사업 재편은 흔하다.

최근 글로벌 제약사인 한국MSD는 당뇨병 치료제인 자누비아의 판권을 종근당으로 넘기면서 이 약의 판매를 담당했던 GM(General medicine)부서 전체에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노조가 반발하고 노동자가 희망퇴직에 응하지 않자 부서원 개인을 불러 면담하는 방식의 일대일 미팅을 실시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사업구조 개편에 따른 인적 구조조정이다.

일본계 대부업체 J트러스트가 2020년 JT저축은행을 사모펀드에 매각하려고 시도할 당시에도 노사 간 고용안정협약이 체결돼 있었다. 그러나 J트러스트는 나몰라라 하면서 매각을 강행했다. 당시 매각을 막아 세운 것은 고용유지협약이 아니라 매수에 나선 사모펀드가 대주주 적격성 승인을 받지 못할 것으로 전망해 인수를 포기한 덕이다.

정규직 정리해고에 날개 단 현행 노조법

이처럼 인수합병, 사업구조 개편 같은 방식이 성행하면서 정리해고도 계속됐다. 과거의 지표지만 2005년~2015년 인수합병된 사업장의 고용불안은 그렇지 않은 사업장보다 월등히 높았다. 인수합병 사업장은 전체 노동자 가운데 1.27%가 정리해고됐지만, 그렇지 않은 사업장은 0.48%로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명예퇴직도 인수합병 사업장은 전체 노동자 중 2.53%가 명예퇴직한 반면, 그렇지 않은 사업장은 0.91%로 역시 두 배 이상 차이가 났다.

종래에는 이런 희망퇴직을 빙자한 정리해고를 막아 내기는 어려웠다. 법원은 줄곧 이른바 ‘경영권’의 손을 들어주는 판례를 쌓았다. 대표적인 게 2001년 대법원 판례다. 대법원은 2001년 삼미종합특수강의 봉관·강관 사업부문을 포항제철(현 포스코) 자회사인 창원특수강에 매각하면서 노동자 1천917명의 고용승계를 배제한 사건에 대해 고용승계의무가 없다고 판결했다. 기업들이 고용승계를 하지 않기로 했으니 노동자는 고용승계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취지다. 이와 같은 판결은 향후 20여년간 꾸준히 축적됐다. 정윤각 사무금융노조 법규국장은 “법원은 인수합병이나 사업구조 개편을 경영권이라며 보호해 왔다”고 설명했다.

하청노동자가 끌어올린 ‘모두를 위한 울타리’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최근 국회를 통과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3조 개정안은 이런 인수합병과 사업구조 개편에 따른 정리해고 시도를 옹호해 온 법원 판결에 균열을 낼 것으로 전망된다. 개정 노조법은 멀게는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와 가깝게는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조선하청노동자가 기워 올린 법이지만, 그 범위는 손해배상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다. 개정 노조법의 변화 중 하나인 ‘권리분쟁의 쟁의행위 대상 포함’이 주인공이다. 정리해고나 희망퇴직 등이 교섭 대상이 될 수 있다. 정기호 민주노총 법률원장은 “권리분쟁 대부분은 정규직에게 해당하는 것”이라며 “노조법 2조 개정 중 사용자 범위 확대는 교섭도 못하던 노동자에게 교섭할 길을 여는 것이라면 권리분쟁을 쟁의행위에 포함시킨 것은 기존의 단체교섭 테이블에 올릴 수 없었던 의제를 새롭게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행 노조법은 노동쟁의를 임금·근로시간·복지·해고 기타 대우 등 근로조건의 ‘결정’에 관한 주장의 불일치로 인해 발생한 분쟁상태로 규정한다. 개정 노조법은 여기서 ‘결정’을 삭제했다. 근로조건 자체가 노동쟁의의 대상이 됐다는 것은 거칠게 해석하면 기업 간 인수합병과 사업구조 재편에 따른 고용상태의 불안도 교섭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방식은 사실 이번 개정 노조법에서 처음 등장한 것도 아니다. 복원에 가깝다. 근로조건의 ‘결정’이라는 문구가 삽입된 1998년 현행 노조법 탄생 이전에는 우리 노조법(당시 노동쟁의조정법)이 이번에 국회를 통과한 개정 노조법과 같이 권리분쟁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경배 순천향대 교수(법학)는 “종전 노동쟁의조정법에서 근로조건으로 하다가 노조법으로 1998년 바뀌면서 결정이란 표현을 집어넣었다”며 “단체교섭으로 해결하지 말고 법원으로 가라는 취지로 사실상 쟁의행위를 억제하기 위한 산물”이라고 설명했다.

구조조정 정당성 판례 변경은 ‘다툼의 여지’

물론 법이 개정됐다고 관행이 한순간에 바뀌기는 어렵다. 이용우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 공동집행위원장(민변 노동위원장)은 “개정 노조법이 경영권과 관련한 정당성을 인정해 온 기존 판례를 모조리 뒤집을 만큼 명확하게 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도 법원 해석을 지켜봐야 한다”고 진단했다. 쟁의행위는 가능하나 이에 따라 실제 정리해고나 희망퇴직을 법원이 ‘불법’으로 판결할지는 확신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기대감은 생긴다. 정윤각 법규국장은 “기존에는 다툼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던 영역에 대해 새롭게 법원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됐다”며 “판결의 근거가 되는 법원(Sources of law)이 변경된 것이니만큼 판례 변경을 요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가능성의 변화는 노조법이 모두의 노조법이 될 수 있는 여지를 연다. 이 공동집행위원장은 “하청과 비정규직 노동자만의 협소한 이해관계에 있는 개정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쟁의행위에 대한 해석관계에서 새 지평을 열었다”며 “헌법상 노동 3권에 더 부합하는 개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체 노동자에게 의미 있는 진전이고 외환위기 이전 시기로 정상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재·어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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