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이 지난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할 태세다. 개정법이 왜 그대로 공포·시행돼야 하는지 전문가들의 주장을 싣는다. <편집자>

▲ 채준호 전북대 교수(경영)
▲ 채준호 전북대 교수(경영)

일명 ‘노란봉투법’이 국회 문턱을 어렵사리 넘었다. 한편에서는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며 즉각적인 시행을 요구하고 있고, 한편에서는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행사해 달라고 한다. 한쪽에서는 이번 법개정이 약자를 보호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한쪽에서는 산업이 마비되고 기업이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관계부터 확인하자. 개정법은 첫 번째 사용자의 개념을 ‘근로조건에 대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자’라고 정의해 결국 근로계약 체결 유무와 상관없이 임금이나 근로시간에 실질적 영향을 끼치면 모두 사용자라고 볼 수 있도록 한 점이다. 소위 ‘진짜 사장’에게 교섭에 임하라고 요구한다. 두 번째로 ‘노동쟁의’의 대상을 ‘근로조건의 결정’에 관한 사항에서 ‘근로조건’에 관한 사항으로 개정해 쟁의행위 범위를 넓혀 사용자가 단체협약 등 합의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노조가 대응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 개인 조합원이 회사에 손해를 얼마를 끼쳤는지 회사가 입증해야 한다. 재계는 불법파업에 대한 특권을 부여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노동계는 손해배상·가압류 폭탄을 통한 노조 길들이기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진짜 사장’이 교섭에 임하도록 하고,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과도한 손배·가압류를 예방하자는 제도가 도입되면 산업은 마비되고 기업이 무너질 것인가. 노란봉투법 논의가 쌍용차 파업에 대한 과도한 손해배상 판결과 그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던진 수많은 생명에 대한 시민들의 안타까운 마음에서 시작된 점을 상기하면 오히려 이번 법개정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은 노란봉투법은 현 정부의 노동개혁 과제인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 해소를 방해하는 적(敵)이 아니라 우군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자. 현 정부와 보수진영은 이른바 대기업·정규직 ‘귀족노조’ 중심의 노동운동이 현재의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만든 주범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목소리를 낼 수 없어 척박한 근로조건에서 낮은 임금으로 일하고 있는 중소·영세·비정규 노동자들에게 잃었던(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목소리를 돌려주는 것이야말로 현 정부가 그토록 원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지난 여름 정부 고위관계자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와 노동시장 약자 보호는 노조법 몇 개 조항을 바꿔서 해결할 수 없고, 원·하청의 자율적인 상생과 연대를 기초로 정부의 지원이 더해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산업안전 이슈에서도 확인됐듯이 노사 간 자율적인 상생과 연대로 과연 원·하청 간 이중구조 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주장을 하려면 지금까지 왜 노사 간 자율적 상생과 연대를 통한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이 되지 않았는지 답을 먼저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노동계는 현 정부가 주장하는 노동개혁의 실상은 장시간 저임금 노동으로의 회귀이자 노동자의 생명을 담보로 한 개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다양한 정책적 지원을 추진 중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를 바라보는 노동계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고도 차갑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노란봉투법 국회 통과는 정부로서는 오히려 호재다. 지금까지 정부가 주장해 오고 있고 노동개혁의 큰 목표 중 하나인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위해 국회가 이렇게까지 지원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 이를 공포하고 시행할 일만 남았다. 대통령도 말하지 않았나. ‘국민은 늘 옳다’고. 그 말을 여전히 믿는다면, 대의민주주의에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에서 통과시킨 법안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려대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다시 한번 국민은 준엄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늘 옳은 국민은 과연 누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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