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재사망 대책 마련을 위한 공동캠페인단’이 지난 4월2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이천 물류창고 화재로 노동자 38명의 목숨을 앗아 간 책임자인 발주처 한익스프레스를 ‘2021 최악의 살인기업’으로 발표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 화재 사고의 유가족이 발주처를 상대로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다. 화재 당시 창고의 대피로를 폐쇄해 노동자 38명이 숨진 것과 관련해 기소된 발주처 팀장은 지난달 25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하지만 형사처벌과 별개로 발주처가 배상해야 한다는 노동계의 목소리가 높다.

최대 쟁점 ‘발주처 배상 책임’
유족측 “한익스프레스는 불법행위자 ”

6일 <매일노동뉴스> 취재 결과 이천 물류창고 화재로 숨진 노동자의 유족 65명은 발주처 ‘한익스프레스’와 TF팀장 A씨, 감리사 ‘전인씨엠’의 감리단장 B씨, 공사감리 책임자 C씨 등 4명을 상대로 손해배상(산) 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확인됐다. 시공사인 ‘건우’는 유족들과 합의해 소송 대상에서 제외됐다.

현재 유족이 낸 소송 4건이 서울중앙지법에 접수된 상태다. 이 중 한 건은 올해 6월 첫 변론기일이 진행됐다. 이번 민사소송에서 유족들의 청구금액은 수십억원에 이른다. 법무법인 마중이 유족들을 대리하고, 한익스프레스 등 사측 대리는 법무법인 율촌과 법무법인 린이 맡았다.

이번 소송에서는 ‘발주처의 배상 책임’ 인정 여부가 최대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형사사건에서 대법원은 한익스프레스 TF팀장 A씨가 통로 폐쇄를 결정한 부분에 대해 ‘구체적인 지시·관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족측 대리인은 “A씨는 불법행위자로서 책임이 있고, 한익스프레스는 A씨가 사무집행에 관해 제3자에게 가한 손해에 대해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익스프레스가 실질적인 도급인이므로 수급인(시공사)이 고용한 제3자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에 대해 민법(756조)에 의한 사용자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취지다.

특히 향후 재판에서 기존 대법원 판례를 토대로 한익스프레스의 배상 책임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발주처(도급인)가 개별 작업에 관해 구체적으로 지시·감독한 경우 안전조치 주의의무를 부담한다고 판시하기도 했다.

A씨는 공사 당시 설계도면상 비상구인 냉동·냉장창고와 기계실 사이의 통로를 폐쇄하도록 결정했다. 나아가 애초 착공일과 준공일이 인허가변경 및 토공사 지연 등으로 늦어지자 시공사에 준공일 단축을 지속해서 요구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따라 시공사는 평소보다 많은 다수의 업체와 인력을 한꺼번에 투입해 여러 공정의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도록 했고, 감리사무소는 이를 묵인했다.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발주처 팀장, 안전조치 주의의무 위반”
“형사 무죄, 책임 면제 의미 아니다”

유족측은 A씨가 안전조치에 대한 주의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고 있다. 감리사 관계자로부터 통로가 대피로의 기능이 있다는 설명을 들었으므로 통로 폐쇄시 화재가 발생하면 노동자들이 탈출할 대피로가 없어진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데도 A씨가 효율성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통로 폐쇄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유족측은 “공사기간 단축 지시에 따라 발포작업과 용접작업이 동시에 진행된 탓에 화재가 발생했다”며 “기계실 통로 폐쇄로 인한 사고는 화재의 원인과 관계없이 한익스프레스에 있다”고 주장했다.

유족측은 감리단장 B씨와 책임자 C씨에 대해서도 ‘업무상 주의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들이 대피로 폐쇄 이후 다른 대피로를 마련해 작업자에게 변경된 대피로에 대해 전파·교육·훈련을 실시하는 등의 충분한 안전조치를 취하는지를 지도·감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C씨는 현장 상주의무가 있는데도 주 3일만 감리활동을 했고, 감리단장인 B씨 역시 C씨가 작성하는 감리일지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고 봤다.

유족측을 대리한 김위정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비록 대법원이 형사사건에서 한익스프레스 담당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모든 책임이 면제됐다는 의미는 아니다”며 “책임의 증명이 완화된 민사소송에서 발주처의 책임 여부를 끝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4월29일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 공사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대피로를 통해 탈출하지 못한 38명의 노동자가 숨지고, 1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달 25일 업무상 과실치사상·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함께 재판에 넘겨진 시공사 건우 현장소장과 안전관리자는 각각 징역 3년과 금고 2년이 확정됐다. 감리단장 B씨도 금고 1년6월을 확정받았다. 시공사인 건우 역시 원심과 마찬가지로 벌금 3천만원이 확정됐다.

유족측은 발주처 책임자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형사 판결이 나오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숨진 노동자인 고 김일수씨의 딸 김지현씨는 “공기단축 때문에 우레탄폼 작업과 용접작업이 동시에 진행돼 피해가 커졌는데도 법원이 그 부분을 전혀 살피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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