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재사망 대책 마련을 위한 공동캠페인단’이 지난 4월2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이천 물류창고 화재로 노동자 38명의 목숨을 앗아 간 책임자인 발주처 한익스프레스를 ‘2021 최악의 살인기업’으로 발표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에서 발생한 화재사고와 관련해 대피로를 폐쇄해 노동자 38명의 목숨을 앗아 간 책임으로 재판에 넘겨진 발주처 한익스프레스 팀장에게 무죄가 확정됐다. 유족은 화재사고를 일으킨 발주처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판결을 납득할 수 없다고 규탄했다. 한익스프레스는 올해 4월 ‘산재사망 대책 마련을 위한 공동캠페인단’에서 ‘2021 최악의 살인기업’으로 선정된 바 있다.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25일 업무상 과실치사상·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한익스프레스 TF 팀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피고인과 검찰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지난해 7월 기소된 지 약 1년4개월 만이다.

함께 재판에 넘겨진 시공사 건우 현장소장과 안전관리자는 각각 징역 3년과 금고 2년이 확정됐다. 건축사무소 소속 감리단장도 금고 1년6월을 확정받았다. 시공사인 건우 역시 원심과 마찬가지로 벌금 3천만원이 확정됐다.

‘이천 물류창고 화재’로 38명 사망·10명 부상
통로 폐쇄 결정한 한익스프레스 팀장, 2심서 무죄

지난해 4월29일 오후 1시32분께 물류창고 공사현장에서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검은 연기와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대피로를 통해 탈출하지 못한 38명의 노동자가 숨지고, 10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우레탄폼 작업과 화물 엘리베이터의 용접을 동시에 진행한 부분이 화재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우레탄은 작은 불씨에도 쉽게 발화해서 폭발 위험이 큰데도 동시 작업이 이뤄진 것이다. 냉동창고의 결로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비상구 대피로를 폐쇄한 조치가 피해를 키웠다.

이처럼 작업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발주처인 한익스프레스의 공사기간 단축 압박이 있었다. 검찰은 한익스프레스 관계자를 비롯해 시공사 건우와 관계자 등 10명을 기소했다. 하지만 법원의 형량은 가벼웠다.

1심은 지난해 12월 원청 현장소장과 안전관리자에게 각각 징역 3년6월과 금고 2년3월을 선고했다. 감리단장은 금고 1년8월형에 처해졌다. 시공사 건우는 벌금 3천만원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한익스프레스 TF 팀장에 대해 재판부는 금고 8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400시간 이수를 명령했다. 그마저 지난 7월 항소심에선 형량이 더 깎였다. 현장소장과 안전관리자는 각각 징역 3년과 금고 2년으로 감형됐다. 감리단장도 금고 1년6월로 줄었다.

특히 통로 폐쇄 결정을 내린 한익스프레스 TF 팀장은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항소심은 “통로 폐쇄 결정은 발주자 권한 내에 있는 행위이며 시공에 관해 구체적인 지시·관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피로 폐쇄 결정을 내린 시점이 개정 산업안전보건법 시행 이전이라 안전조치에 대한 주의의무를 발주처 관계자에게 직접 묻기는 어렵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 팀장은 폐쇄된 통로를 직접 다니며 진행 상황을 보고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재판부는 한익스프레스가 건우와 안전조치의무 관련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대법원도 이러한 원심 판단이 옳다고 봤다.
 

한익스프레스 화재참사 1주기를 앞두고 민주노총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 참사 유가족들이 지난 4월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한건축사회관 앞에서 참사 1주기 추모행동 선포 기자회견을 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한익스프레스 화재참사 1주기를 앞두고 민주노총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 참사 유가족들이 지난 4월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한건축사회관 앞에서 참사 1주기 추모행동 선포 기자회견을 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유족 “공기단축 피해 명백한데, 법원 간과”
산재 변호사 “발주자 책임에 한계 보여준 판결”

유족과 법조계는 발주처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숨진 노동자 중 고 김일수씨의 딸 김지현씨는 선고 이후 <매일노동뉴스>와의 통화에서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돼 분하고 억울하다. 분명히 공기단축 때문에 피해 본 게 사실인데 법원은 그 부분을 전혀 살피지 않은 것 같다”며 “원청이 ‘꼬리 자르기’ 식으로 하청에 떠넘기면 다른 사고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지 않겠냐”고 비판했다. 유족측은 원청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권미정 김용균재단 사무처장도 “(발주처 책임자가) 일일이 언제 어떻게 비상구를 막으라고 지시해야 구체적이냐”며 “원청이 공기단축이라고 말하는 순간 하청은 기한을 맞추기 위해 혼재 작업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것은 지시가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손익찬 변호사(법률사무소 일과사람)는 “현행 법률로는 발주자의 책임을 묻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 판결”이라며 “국회에서 논의 중인 건설안전특별법은 발주자에게도 폭넓은 안전관리의무를 정하고 안전자문사를 통해 공사기간과 비용에 관해 자문을 받도록 정하고 있어 건설안전특별법 통과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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