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격랑이었다. 거센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공허한 자찬과 기약 없는 약속만 덩그러니 남았다. 희망을 잃은 수천명의 노동자가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떴다. 그런 후 좌절감에 몇몇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남은 노동자들은 언제일지 모를 전환배치와 무급휴직을 기다리고 있다. 공장 폐쇄 전조라는 1교대제 개편 소문이 공장과 공장을 떠다닌다.올해 상반기 숱한 화제를 낳았던 사업장, 한국지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얘기다. 그것도 고용이 상대적으로 안정됐다는 정규직 사례다. 정규직 일자리의 총알받이가 됐던 비정규직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소
"회사는 미동도 않고, 파업은 길어지지만 해법은 안 보이고. 사무장이랑 올라가서 한 번 싸워 볼까 싶은데…."파인텍 노동자 홍기탁씨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파인텍 노동자 차광호씨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잘랐다. "무조건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앞으로 말도 꺼내지 말라."서너 개 화분을 벗 삼아 408일을 하늘집에서 살았다. 생수통에 오줌을 받아 바람막이로 세웠다. 햇빛이 바람막이를 비추면 노란 조명이 굴뚝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체력단련 한답시고 매일 팔굽혀펴기 하던 장소, 바닥 페인트에는 차광호씨의
한파가 찾아온 지난 15일 오후 서울 청계천 소라광장 입구는 “법외노조를 철회하라”는 함성으로 가득 찼다. 연차휴가를 내고 전국에서 올라온 전국교직원노조(위원장 조창익) 조합원 3천500여명(노조 추산)이 일대 도로를 가득 메우고 전국 교사결의대회를 열었다. 장갑·손난로·담요·깔개는 기본이고, 일부 조합원은 마스크와 귀마개·모자까지 준비했다. 한 조합원은
“아아, 선배님!” 한 남자의 입에서 “갑질 선배님”이라는 단어가 절로 나왔다. ‘(회사에서) 갑질(을 미리 당해 본) 선배님’이라는 의미다. 또 다른 중년 남자가 직장갑질 경험담과 대응법을 말하는 것을 듣는 동안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연신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직장갑질119가 지난 7일 저녁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갑질 피해자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는 회사에 충분한 압박이 될 수 있는 단체행동을 합법적으로 해 나가겠습니다.” 고영민 민주연합노조 세스코지부장이 조합원 300여명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조합원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때로 “맞다” “옳소” 같은 추임새로 동의를 표했다. 6일 오후 세스코지부가 올해 2월 노조 설립 뒤 첫 파업을 했다. 서울 강동구 세스코
“실례가 안 된다면, 밀양 송전탑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세요?”순간 조용해졌다. 특강을 하던 전력산업 출신 노동자에게 던져진 날카로운 질문. 곧이어 “오~” 하는 웅성거림. 강사는 고2 학생에게 “혹시 사전에 토론해서 준비한 건가요”라고 농을 던진 뒤 자세를 가다듬었다.“할아버지 할머니들 그냥 따르쇼, 이래선 안 됩니다. 충분히 토론하고 인내하면서 처리해야 하는 문제인데 정부가 막 밀어붙였어요. 주민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송전선로를 옆으로 돌려야 합니다. 전문용어로 국민적 수용성이라고 하는데, 국민이 수용할 수 있는 그런 조치를 먼저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에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전태일의 글에 가수 김현성이 곡을 붙인 가 흐르자 관객 속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중년의 한 남성 관객은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남몰래 훔쳤다. 스물두 살 전태일의 결코 쉽지 않았을 그 결단이 47년이 흐른 지금 관객들의 마음에 와 닿는 순간이었다.전태일 노래극 의 막이 올랐다. 지난 20일 저녁 서울 마포구 가톨릭청년회관 CY씨어터에
작업복 차림 전태일 열사의 오른손에 붉은 장미꽃다발을 놓은 가이 라이더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 열사와 국제 노동운동가가 조우한 순간 박수가 나왔다.전태일 동상 앞에 고개 숙인 라이더 사무총장라이더 사무총장이 5일 오후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서울 평화시장 인근 청계천 '전태일 다리(버들다리)'를 방문했다. 서울시가 주최하고 가 주관하는 '좋은 일자리 도시 국제포럼' 참석차 한국을 찾은 라이더 총장은 1970년대 평화시장
여기,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루빨리 쓸모없어지길 바라며 지은 집이 있다. 2년 동안 7억원이 넘는 마음이 모여 집짓기가 시작됐고, 올해 4월 첫 삽을 뜬 뒤 1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사판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그렇게 만든 집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 비정규 노동자들을 위한 쉼터이자 연대의 공간이 될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이다. 십시일반 모금과 재능연대로 지어진 꿀잠지난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주택가에서 열린 '꿀잠' 개관식은 마을 잔칫날을 방불케 했다. 만장을 앞세운 풍물패 길놀이 뒤로 김소
“택밴데요. 지금 집에 계세요?”턱까지 쌓아 올린 상자를 한아름 안고 걸어가던 사내가 목소리를 높인다. 손 대신 오른쪽 어깨를 올려 머리 사이에 끼듯 휴대전화를 잡고 걷는 뒷모습이 힘겹다. CJ대한통운 택배기사 김희원(43·가명)씨다. 택배 차량을 골목 어귀에 세워 두고, 상자를 내려 근처 건물에 배달한 뒤 돌아오기를 여러 번. 희원씨의 손과 발이 바빴다.가 지난 11일 그와 함께했다. 희원씨가 담당하는 구역은 서울 주택가다. 단독주택과 빌라가 많아 엘리베이터보다 계단을 오르내릴 일이 많다.이날 낮 기온은 32도를 웃
전화기 수십 대가 갑자기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폭염경보 문자 왔네. 다음 농성자들 오늘 하루 죽어 나겠다." "밤 온도가 28도래. 잠은 다 잤네. 하하하." "씻고 낮잠이나 좀 잤으면 소원이 없겠다." 3일 오전 11시 서울 송파구 공원 쉼터. 땀에 전 투쟁조끼를 걸친 채 바닥에 주저앉은 노동자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댄다. 사내하
“우리가 왜 여 와 있는데예. 여자들이 이 땡볕에 치질도 없는데 찌(지)지면서 앉아 가지고. 누구는 손가락만 까딱하면 돈을 쓰고 하는데 우리는 그 1만원을 받을라고 몇 년을 이렇게 살고 있네예.” 부산 홈플러스노조 조합원 김아무개씨가 마이크를 잡고 사투리 섞어 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 시간째 뙤약볕에 달궈진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뜨거운 숨을 내쉬던 마트
“전력이 민영화되면 가장 먼저 (전기가) 끊기는 곳이 이곳 같은 도서산간입니다. 돈이 안 되는데 설비와 사람을 심어 놓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죠. 도서산간은 물론이고 국민 전체를 위해 값싸고 질 좋은 전기를 공급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난 17일 오전 인천 옹진군 덕적도 남단에 위치한 밧지름해수욕장. 해변을 바라보고 왼편에 위치한 소나무 숲에 사람들이
장정 네 명이 섀시 하나를 붙들고 우왕좌왕했다."유리를 깨서 해체하는 게 낫겠어요.""그러다 다쳐요. 고무파킹 제거하고 그대로 떼내면 돼.""십장이 시키는 대로 해요. 잡부는 선택권이 없어."'십장' 송경동 시인이 '잡부' 송기호 변호사에게 지시했다. 십장의 지휘 아래 장정들이 부지런히 손을 놀렸지만 영 어색하다. 그 모습을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던 인테리어 기공목수 한 명에게 물었다. "어때 보이세요?" "뭐…. 잘 하네요." 진정성은 '1'도 없어 보였다.한
“거제를 제 기억에서 지우고 싶습니다.”6명이 목숨을 잃고 25명이 다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타워크레인 충돌사고 현장에 박철희(45)씨가 있었다. 동생의 권유로 삼성중공업에서 일한 박씨는 지난 1일도 여느 때와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후 2시50분,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그랬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 위 크레인이 방금 전 박씨와 함께 담배를 태우던 동생을 덮쳤다.“사고 현장이 너무 참혹했어요. 크레인 아래 깔린 사람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죠. 사고 직후 험악한 사체가 환영으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동생이 저한테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후 세 번째 맞은 4월16일. 3년 전 그날처럼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다. 시민 2만여명이 바람에 떨어지는 벚꽃을 맞으며 정부합동분향소가 위치한 경기도 안산 화랑유원지로 모였다. 모자와 가방·옷·손목에 노란리본을 달고 약속했다. “그날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겠으니 제발 돌아와 달라”고.◇&ld
지난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L비즈니스센터 강의실. 컴퓨터로 ‘실행성과를 높이는 SMART 기획力’ 동영상 강좌를 보던 SK플래닛노조 간부 정아무개씨가 갑자기 목과 허리에 통증을 호소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침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걸어 다녔던 그는 119 구급차를 타고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정씨는 최근 목디스크와 허리디스크 진단을
“세월호를 직접 보니 어땠냐”고 묻자 지체 없이 울음이 튀어나왔다. 질문에 이어 흐느낌이 나올 때까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참고 있던 울음이었다. 용수철 같은 눈물이었다.세월호가 지난달 31일 사고발생 1천81일 만에 뭍으로 돌아왔다. 이날 오후 목표혜인여중 3학년 이정민(15)양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맨드라미색 교복을 입고 세월호가
친노동자 정권을 염원하는 한국노총 단위노조 대표자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단위노조 대표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고무된 듯 네 명의 대선주자들은 마이크를 잡고 너나없이 "노동존중 대한민국, 친노동정권을 만들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한국노총 전국단위노조대표자대회에서다. 전국에서 3천여명의 대표자들이
“꿈꾸는 사람에게 냉소를 보내지 않고 응원하는 대한민국이 됐으면 좋겠어요.”올해 대학에 입학한 이지현(20)씨는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소식을 접하며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기대를 보였다. 이씨의 꿈은 패션 디자이너다. 대학에서 패션산업을 전공하고 있다. 이씨는 지난 10일 헌법재판소가 박 전 대통령 파면을 선고하는 장면을 스마트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