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11일 부산의 한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추락해 숨진 하청업체 소속 일용직 노동자 고 강보경(29)씨의 어머니 이숙련(71)씨가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DL이앤씨 본사 앞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아들 영정 사진을 들고 오열하고 있다. <홍준표 기자>

“이 시간이 걸려 이렇게 끝났다는 것에 참을 수 없는 마음의 분노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유족이 여기까지 와서 분향소를 차렸는데도 이해욱 DL그룹 회장님이 직접 나서서 사과하지 않았다는 게 못마땅합니다.”

DL이앤씨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에서 지난 8월11일 추락해 숨진 하청업체 소속 일용직 노동자 고 강보경(29)씨의 어머니 이숙련(71)씨는 21일 오전 DL이앤씨와의 합의 조인식 이후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이씨는 “우리 아이가 유리를 안고 아파트에서 떨어졌을 때 얼마나 놀랐겠냐”며 “떨어지는 순간에 피가 하늘로 솟구쳤다고 하는데 이 회장에게 이걸 어떻게 하겠는지 꼭 묻고 싶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강씨가 목숨을 잃은 지 103일 만이자 지난달 18일부터 본사 앞에서 유족이 분향소를 차리고 농성을 한 지 34일째다.

원·하청 대표, 분향소서 무릎 꿇고 사과

유족측은 이날 서울 종로구 평동 DL이앤씨 본사에서 사측과 합의하고 조인식을 진행했다. 그룹과 유족은 △유족 사과 및 사과문 일간지 게재 △자체 사고조사보고서 및 재발방지대책 제공 △민사상 손해배상금 지급 등에 합의했다. 마창민 DL이앤씨 대표이사와 정재훈 KCC 대표이사는 전날(20일) 분향소를 찾아 강씨 어머니 앞에서 무릎 꿇고 공식사과했다. 사과 한마디까지 102일이 걸렸다. 강씨 어머니는 “왜 진작 찾아오지 않았나. 늦어도 많이 늦었다”며 “그동안 가족을 잃은 유족의 고통을 생각이라도 해 봤냐”고 호통쳤다.

그동안 10여 차례 진행된 협상 과정에서 DL그룹이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러다가 원·하청 대표의 사과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그룹측은 이날 강씨를 포함한 산재사고 사망자 8명 모두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DL그룹의 공개사과는 대형 건설사로서는 최초다. 그룹측은 이해욱 DL그룹 회장·마창민 DL이앤씨 대표이사·곽수윤 DL건설 대표이사 명의로 된 사과문을 통해 “DL그룹 작업장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고 강보경님과 근로자분들의 명복을 빌며 산재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중대재해 예방에 더욱 매진하겠다는 약속도 담았다. 특히 “고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DL그룹 차원에서 안전보건 시스템을 원점에서 정비하는 등 안전대책 마련에 소홀함이 없도록 살피겠다”며 “사회적 눈높이와 기대에 부합할 수 있는 대책과 대안을 마련해 절대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안전한 작업장을 구축하겠다”고 강조했다. 노동·시민단체로 구성된 ‘DL이앤씨 중대재해 근절 및 고 강보경 일용직 하청노동자 사망 시민대책위원회’는 “그룹 차원에서 철저한 재발방지대책을 수립해 안전 최우선 경영에 매진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환영했다.

▲ DL이앤씨·KCC와 유족측이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DL이앤씨 본사에서 고 강보경씨의 중대재해 사고와 관련해 합의 조인식을 가지고 있다. <시민대책위>
▲ DL이앤씨·KCC와 유족측이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DL이앤씨 본사에서 고 강보경씨의 중대재해 사고와 관련해 합의 조인식을 가지고 있다. <시민대책위>

“이해욱 회장,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 반쪽 위로

그룹이 ‘사고조사보고서’와 ‘재발방지대책’을 제출한 부분도 의미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룹측은 이날 수백 쪽에 달하는 파일 2개를 유족측에 건넸다. 시민대책위 집행위원장인 권영국 변호사(법무법인 두율)는 “재발방지대책의 실효성을 평가하고 감시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사상 손해배상과 별개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1심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을 하도록 한 점도 의미가 있다고 봤다.

유족의 ‘싸움’ 과정은 쉽지 않았다. 유족측에 따르면 그룹측은 이해욱 회장의 공개사과를 계속 거부해 왔다. 결국 이 회장은 끝내 분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 회장은 다음달 1일 열리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산업재해 청문회에 출석할 예정이다. 이 회장은 올해 국정감사에서 증인으로 소환됐지만, 해외 출장을 이유로 불출석했다. 강씨 누나 지선(33)씨는 “이 회장은 분향소, 1인 시위 장소 등 어떠한 곳에도 나타나지 않았다”며 “그룹이 계속 사과를 거부하면 이 회장이 출근하는 위치를 파악해 얘기하려는 생각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그룹측은 시민대책위가 제안한 ‘건설안전조사위원회’ 구성에도 난색을 보였다. 시민대책위는 “추천한 전문가들이 다수 포함되는 위원회를 구성해 건설공사 전반의 안전과 중대재해 원인에 대한 심층적이고 구조적인 조사를 하자고 제안했다”며 “건설업계의 고질적인 사망사고의 근본적 원인을 분석하고 그 대안을 마련해 보자는 취지였으나 끝내 성취하지 못한 것은 한계”라고 평가했다. 대책위는 국회 청문회에서 국회와 노동·시민단체, 건설업계가 참여하는 방식의 위원회 구성을 제안할 예정이다.

유족 “얼굴 없는 7명 가슴 아파, 약간의 위로 됐으면”

▲ 고 강보경씨 어머니 이숙련씨가 21일 오전 ‘디앨이앤씨 중대재해 근절 및 고 강보경 일용직 하청노동자 사망 시민대책위원회’의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홍준표 기자>
▲ 고 강보경씨 어머니 이숙련씨가 21일 오전 ‘디앨이앤씨 중대재해 근절 및 고 강보경 일용직 하청노동자 사망 시민대책위원회’의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홍준표 기자>

사고 103일 만에 천막농성은 끝을 맺었다. 그러나 유족은 ‘반쪽짜리’ 위로에 불과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씨 누나는 이날 조인식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길거리에서 비바람을 맞아야 당연한 사과 하나를 받을 수 있단 걸 알았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3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한다는 소리가 책임은 질 수 없으나 죄송하다는 말뿐이었다”며 “여러 명의 사망사고가 일어난 뒤 대기업이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서 후퇴하고 있는 듯한 우리나라가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앞서 DL이앤씨 건설현장에서 숨진 7명의 노동자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고 전했다. 강씨 누나는 “이름도 얼굴도 없는 까만 영정 사진을 보고 있으니, 동생만 부각되는 것 같아 너무 가슴 아팠다”며 “7명의 유족분도 TV나 뉴스를 통해 동생 사고 소식을 들었을 것 같다. 동생 사고를 통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강씨 어머니는 “내 아들을 살려 내라”며 오열했다. 분향소 철거 전 마지막으로 아들의 영정 사진을 꼭 붙들고 입을 맞추며 통곡하기도 했다. 홀로 조문한 대학생 신승호(21)씨도 옆에서 같이 울었다. 신씨는 “사람들이 모두 연결돼 있는 것 같아 찾았다”며 “수많은 사망사고가 있지만, 강보경씨 사고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내 아들 살려내라” 모친, 영정 붙들고 오열

강씨 어머니는 검은 상복을 입고 연신 눈물을 닦았다. 100여일의 농성은 멈췄지만, 그룹의 공개사과만으로 큰 위로는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도와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고 했다. 강씨 누나는 “권영국 변호사님은 분향소 설치 첫날 맨바닥에 천 하나 깔고 자면서 감기까지 걸렸다”며 “또 동생이 다니던 통영의 동원중학교 담임선생님인 이신정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 이 선생님은 집이 가난해 힘들 때 겨울에 이불까지 사오며 챙겨주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서른을 앞둔 강씨는 8월11일 오전10시10분께 DL이앤씨가 시공한 부산 연제구 레이카운티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하청업체인 KCC 소속으로 20미터 높이 아파트 66층에서 파손된 유리창을 교체하던 중 떨어지는 창틀을 잡고 있다가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당시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안전보건규칙)상 높이 10미터에 설치됐어야 할 추락방호망과 안전대·안전고리·안전모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