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나영 기자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지나며 모두가 발전하고 변해가는데 봉제인들만 주위를 둘러봐도 환경·시간·공임 무엇 하나 혜택이라곤 없군요.”(봉제노동자 조아무개씨)
“장인이라 불리는 50년 기술자 수입이 편의점 알바 수입도 안 됩니다.”(제화노동자 최아무개씨)
“인쇄 종사자들은 거의 아사 직전에 있습니다.”(인쇄노동자 이아무개씨)
“주얼리 노동자들도 정당한 대우를 받고 일하고 싶습니다. 종로 한복판에서 70년대 대우를 받고 일한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네요.”(주얼리 노동자 박아무개씨)

4·7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지난 3월16일부터 지난달 6일까지 봉제·제화·주얼리·인쇄업종에 종사하는 도심제조업 노동자들이 매니페스토 대행진을 했다. 도심제조업 노동자에 대한 4대 보험 적용을 비롯한 노동기본권 보장을 정책으로 반영할 것을 서울시장 후보들에게 요구하는 행사였다.

대행진기간 동안 이들은 각 업종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을 모았다. 업종별 노동자들이 밀집된 지역을 찾아다니며 “서울시장에 당선될 이에게 요구·제안사항을 담은 엽서를 쓰면 이후 당선자에게 전달하겠다”며 노동자들에게 엽서 작성을 요청한 것이다. 제화업은 성수동, 인쇄업은 을지로, 보석세공업은 종로구에 밀집해 있다. 봉제업은 창신동·동대문·독산동을 비롯한 서울 전역 곳곳에 밀집해 있다. 엽서에는 ‘저임금·4대보험 적용 배제·장시간 노동·사업장 영세화 개선’ 같은 내용이 담겼다. 이정기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장은 “행사기간 동안 받은 수천 장의 엽서 중 신중하게 고를 것도 없이 몇 장만 뽑아도 다 똑같은 (열악한 노동환경) 이야기를 한다”고 전했다. 도심제조업 노동자들의 엽서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선 어떤 활동이 필요할까.

서울노동권익센터와 매일노동뉴스·도심제조노동조합연석회의·민주노총은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131회 세계노동절 맞이 도심제조 노동자 공동좌담회’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했다. 연석회의는 2019년 서울봉제인지회와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 주얼리분회,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 인쇄업종분과 준비위원회가 모여 구성됐다.

“특수고용 노동자조차 못 되는 비공식 노동자”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따르면 서울 도심제조업 노동자는 30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 중 다수는 영세 소기업에서 일한다.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노동법에서 배제된 채 일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실제 대행진 기간 동안 도심제조 노동자들은 4대 보험 적용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다단계 하청구조로 이뤄지는 봉제시장에서 피라미드 가장 밑바닥에 있는 봉제노동자들은 ‘객공’으로 흩어져 일한다. 비공식 노동자로 일하는 탓에 4대보험 적용에서도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제화노동자들의 경우 최근 노동자성 인정 판례가 속속 나오곤 있긴 하지만, 여전히 다수가 개인사업자 또는 특수고용 노동자·비공식 노동자 신분인 탓에 4대 보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주얼리 업체의 경우 4대 보험 의무가입 사업장이지만 제도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용자가 노동자들을 4대 보험에 가입시키지 않으면서다.

4대 보험 미적용으로 인한 어려움은 코로나19 상황에서 더 확연히 드러났다. 고용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으면 고용유지지원금 같은 정부 지원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제화노동자들은 최근 몇 년간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투쟁하고, 노동을 증빙할 자료도 모아둔 덕에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받는 긴급고용안정지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비공식 노동자로 일했던 봉제업과 주얼리 노동자들은 일반 노동자나 특수고용 노동자가 받을 수 있는 지원금 모두에서 배제됐다. 박완규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장은 “우리는 노동자성 인정을 요구했는데 그게 안 되니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받는 지원금을 받았다”며 “이런 현실이 모순적인 것 같다”고 귀띔했다. 김정봉 금속노조 주얼리분회장은 “노동자들은 월급을 받는 엄연한 노동자임에도 사업주가 급여를 봉투로 주거나 4대 보험에 가입해 주지 않아 비공식 노동자로 잡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최정우 민주노총 미조직전략조직국장은 “도심제조업 노동자들의 특성에 따라 맞춤형 사회안정망과 고용안정망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연석회의에 따르면 인쇄노동자들도 이번 대행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진훈 인쇄업종분과 준비위원장은 “인쇄노동자들에게 ‘4대 보험 적용’이 주가 된 대행진 슬로건은 사실 그다지 관심을 끌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면서도 “인쇄노동자들이 많은 호응을 보인 것은 그만큼 그들이 저임금에,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인쇄노동자들은 금속노조 소속 인쇄업종분과 설립을 준비 중이다.

정부가 도심제조업과 관련한 지원 정책을 펴고 있지만 해당 정책이 노동조건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진훈 분과장은 “을지로에서 인쇄업을 하는 사람들이 2만5천명가량 되는데 정작 노동자들이나 입주업체들이 도움이 된다고 느낄 만한 지원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정기 지회장도 “정부 지원사업들이 주로 사업주들로 구성된 협회를 통해 이뤄진다”며 “그런데 봉제 관련 협회에서 그나마 여력이 있는 분들이 이 사업을 주도하다 보니 실제 정말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봉제노동자들의 이해가 대변되지 않고 이들과 전혀 소통도 이뤄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도심제조업 노동자 초기업교섭 이뤄져야”

도심제조업 노동자들의 요구를 관철할 방법으로는 초기업교섭이 제시됐다. 최정우 국장은 “도심제조업 노동자들의 사업장이 워낙 열악하다 보니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작은 사업장 노동자 초기업교섭의 좋은 사례로 성장했으면 좋겠고 여기에 민주노총도 전폭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초기업단위 교섭은 현실화가 쉽지 않다. 게다가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 뒤 가능성은 더욱 낮아졌다. 김하늬 민주노총 서울본부 사무차장은 “(서울시쪽이) 민주노총 서울본부를 사업 파트너로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며 “아직 오세훈 시장 취임 이후 정무라인 구성이 덜 돼서 노동담당자가 오고 나서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봐야겠지만 현재까지 그런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시 교섭자리에 노동정책·제조업정책 관련 담당자가 나와야 하는데 노동정책과가 살아남을지도 불분명하다”며 “제조업정책팀은 (노동정책과보다) 우리 사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용자를 교섭에 나오도록 하는 것은 더 큰 과제다. 김하늬 차장은 “사업주들 사이에서도 이해다툼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며 “우리도 우리의 요구와 지향을 통일시켜야 투쟁이 되지만 사업주도 그들의 이해관계가 통일돼야 우리와 교섭 파트너로 제대로 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업주들의 이해관계가 통일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노조가 투쟁하는 것”이라며 “노조가 투쟁하면 사용자측도 노조에 대한 적대감으로든, 노조와 협력해서 풀어 가야겠다는 생각으로든 공통의 목표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도심제조연대회의 상설기구로 활동 이어 갈 것”

좌담회에서는 도심제조업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다양한 방안이 제시됐다. 최정우 국장은 “도심제조업 노동자들을 두고 약하고 여리다는 뜻이 담긴 ‘취약계층’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 한다”며 “주체성이 떨어지기 때문인데 이들이 당당한 교섭의 주체로 요구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모아 내서 힘을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울시나 대기업의 자금을 활용해 기금을 조성해 도심제조업 노동자 복지를 위해 활용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연석회의 활동을 상설적으로 이어 가자는 데도 한 목소리를 냈다. 정경화 서울노동권익센터 네트워크 담당 전문위원은 “도심제조업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에 서울지역에 있는 22개 노동자종합지원센터들도 역할을 찾고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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