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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노동상에 비친 한국노동운동사] 독재정권에 저항하고, 잘리고, 비정규직 된 ‘제2의 전태일들’
   
▲ 전태일 기념사업회가 1988년 10월21일 각 노동단체에 보낸 협조공문. 전태일 노동상 수상 후보를 추천해 달라는 내용이다.전태일재단
   
▲ 2014년 11월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는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제22회 전태일 노동자 상을 받았다. 정기훈 기자

“권용목 동지는 현대엔진노동조합 결성을 성공한 이후로 무수한 회유와 협박, 공갈, 물리적 탄압을 받았다. … 그럼에도 추호의 흐트러짐이나 물러섬 없이 불굴의 투쟁정신을 보여 줬다.”(1988년 11월 전태일 기념사업회)

“희망연대노동조합 씨앤앰지부는 … 하청업체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를 개선하고자 직접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조직사업을 진행해 2013년 2월 케이블방송 씨앤앰 비정규직지부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2015년 11월 전태일재단)

전태일재단(2009년 7월까지는 전태일 기념사업회)이 처음 전태일 노동상 수상자를 발표했을 때와 가장 최근 발표했을 때 밝힌 수상자 선정 배경이다.

27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노조 만들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점은 비슷하다. 고 권용목씨가 현대엔진노조를 결정한 뒤 숱한 어려움을 겪은 것처럼, 당시에는 이른바 ‘민주노조’ 깃발을 꽂는다는 것은 해고나 투옥까지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27년 전보다 노조 만들기가 쉬워졌다는 얘기는 어디까지나 대기업 정규직에게 해당된다. 사내하청이나 협력업체,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면 계약해지로 이어지기 일쑤다. 그렇기 때문에 씨앤앰 사례처럼 정규직이 비정규직 노조 만들기를 적극 도와야 비로소 노조라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렇듯 전태일 노동상 수상자들을 보면 군사독재정권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노조 역사, 노동자들의 삶이 녹아 있다. 그 당시 가장 치열하게, 힘겹게 싸우면서 주변의 노동자·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개인·단체에게 주는 상이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만들다가, 후배들은 지키다가 ‘고통’

전태일 노동상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직후 제정됐다. 때문에 초기 전태일 노동상 수상자들은 노조를 입에 담는 것조차 불경으로 몰리던 시절 노조를 만들거나 확대한 이들이었다.

2회(1989년) 수상자인 마창노련·전교조는 군사독재정권 탄압을 견뎌 내고 만들어진 최초의 지역노조협의회와 교직원 단일노조라는 점이 주목을 받았다.

1990년 3회 수상자는 그해 1월 출범해 5월 총파업을 강행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였다. 4회(1995년) 수상자인 과학기술노조(현재 공공연구노조)는 최초 소산별노조 주인공으로, 5회(1996년) 수상자인 기아자동차노조·서울지하철노조는 민주노총 창립을 주도한 공로자로 인정받았다.

대한민국 노동자들에게 노조를 만드는 것도 어려웠지만, 노조를 지키는 것 또한 그랬다. 노조 활동이나 투쟁을 제약하는 법과 제도는 이른바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다.

9회 전태일 노동상 수상자인 롯데호텔노조와 차수련 보건의료노조 위원장, 10회 수상자인 이용득 금융노조 위원장, 11회 수상 주인공인 보건의료노조 경희의료원지부 사례가 딱 그렇다.

차 위원장은 상을 받던 2000년 11월 당시 구속된 상태였다. 중앙노동위원회가 중재재정을 하면 파업을 할 수 없었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어기고 파업을 강행한 것이 원인이었다. 한국노총 출신으로는 첫 전태일 노동상 수상자로 주목을 끌었던 이 위원장도 구속 상태에서 상을 받았다. 주택·국민은행 합병을 반대하면서 파업을 주도했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역시 필수공익사업장 직권중재 제도의 희생자였다.

롯데호텔노조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을 요구하면서 2000년 6월9일 파업에 들어갔는데 필수공익사업장이 아닌데도 불법파업으로 간주됐다. 노사 어느 한쪽이 노동위원회에 중재를 신청하고, 노동위가 중재안을 내면 파업을 할 수 없는 단협상 일방중재 조항 때문이었다.

당시 노조가 파업농성을 했던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 경찰특공대까지 투입된 충격적인 진압 장면은 노동자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우리나라 사용자들의 지독한 노조 혐오증은 2000년대 중반은 물론,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2006년과 2011년 각각 전태일 노동상을 받은 보건의료노조 부천세종병원지부, 학습지노조 재능지부는 사측의 단협해지 통보로 기나긴 투쟁의 길로 들어선 경우다.

금속노조 유성기업 아산지회(2013년·21회 수상)는 단협해지·용역경비 폭력·해고·복수노조 설립 같은 대한민국 노조탄압의 모든 형태를 경험한 단체다. 아산지회는 아니지만 영동지회 조합원으로 지난 3월 노조탄압에 괴로워하던 고 한광호씨가 목숨을 끊을 정도로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싸움은 지금도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20년간 일상화된 ‘잘려 나가기’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리해고제가 도입되면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 역시 전태일 후예들에게 일상적인 모습이 됐다. 1~5회 전태일 노동상 주인공들이 모두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노조를 결성·확대시킨 이들인 반면, 그 이후에는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된 노동자들이 전태일 노동상에 잇따라 이름을 올렸다.

97년 전태일 노동상을 받은 삼미특수강노조가 첫 주인공이었다. 당시 포항제철이 삼미특수강의 봉강·강관 부문을 자산매매계약 방식으로 인수하면서 노동자들의 고용승계를 거부했다. 97년에는 정리해고제도 도입이 2년 유보된 상태였는데 “영업양수·양도가 아닌 자산매매”라는 이유로 포항제철은 사실상 정리해고를 강행했다.

삼미특수강 노동자들의 투쟁은 2001년 대법원이 “포철의 삼미특수강 인수는 (고용승계 의무가 있는) 영업양수·양도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고용을 승계할 의무가 없다”고 결론 내리면서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전태일 노동상 수상 당시 노조는 “매달리는 자식의 손을 뿌리치고 눈물을 머금으면서 서울로 향하지 않아도, 장기기증과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지 않아도, 가족들이 아기를 엎고 길거리로 나다니는 처절한 생존권 사수투쟁을 하지 않아도, 정리해고 당하지 않고 고용이 승계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꼭 승리해야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먼저 정리해고를 경험한 선배들의 바람대로 세상은 후배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98년 전태일 노동상에는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에 맞서 힘겹게 싸우고 있던 현대중기산업노조와 동아엔지니어링노조가 선정됐다.

당시 전태일 노동상 심사위원회는 “IMF를 빌미로 시장경제 확립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행해지고 있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퇴출기업이 속출하는 가운데 이들 퇴출기업 노동자들의 생존권 지키기 투쟁이 정리해고 저지투쟁과 함께 98년 싸움의 중심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듬해 99년에도 회사의 무리한 경영확장의 희생양이 되면서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한 한라중공업노조(현재 금속노조 현대삼호중공업지회)가 수상자로 선정됐다.

IMF를 계기로 정리해고제가 도입되면서 일상적인 고용불안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풍경은 최근 전태일 노동상에도 투영되고 있다. 한라중공업노조 이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농성자들(2011년·19회 수상),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2012년·20회 수상), 코오롱 정리해고 분쇄투쟁위원회(2013년·21회 수상), 차광호씨와 스타케미칼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2015년·23회 수상)가 기업들의 무책임한 구조조정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

   
 

전태일의 후예가 된 비정규 노동자들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늘어난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도 전태일 노동상 품에 들어왔다. 무자비한 경찰진압으로 유명해진 2000년 롯데호텔노조 파업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노동자의 절반을 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였다.

레미콘 기사들로 구성된 건설운송노조(2001년·11회 수상)·운송하역노조 화물연대(2003년·12회 수상)·학습지노조 재능지부(2011년·19회 수상) 투쟁은 노동자로, 노조로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싸움이었다.

비록 정규직 출신이지만 고 김태환 한국노총 충주지부장(2005년·14회 수상)은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려다가 파업현장에 대체투입된 사측의 레미콘 차량에 치여 참혹하게 숨졌다.

산업현장을 가리지 않고 번진 간접고용 노동자들도 전태일의 후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모닝을 만드는 기아자동차 협력업체의 사내하청 노동자' 금속노조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2010년·18회 수상)는 제조업 현장에 무분별하게 도입된 사내하청 고용실태를 고발했다.

제조업만이 아니었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2014년·22회 수상)와 희망연대노조 씨앤앰지부(2015년·23회)의 전태일 노동상 수상은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한 2라운드 불법파견 투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전태일 노동상 주인공이 변심한다면?
주최측 제정 당시 “미래보단 현재 기여도가 중요”


제1회 전태일 노동상 수상자였던 고 권용목씨. 상을 처음 제정했던 1988년 현대엔진노조 결성·활동과정에서 투옥을 반복했던 권씨가 첫 전태일 노동상 주인공이 되는 것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현대엔진노조 결성은 현대중공업노조 창립 등으로 현대그룹에 파열구를 냈고, 87년 노동자대투쟁의 발화점이 됐기 때문이다.

이후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까지 지냈던 그는 2002년부터 이른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2006년께부터는 뉴라이트 계열로까지 변신했다. 노동계 입장에서는 변신이 아니라 배신이었다.

권씨는 88년 전태일 노동상을 받을 무렵 동료들에게 옥중서신을 보내 이렇게 강조했다.

“마치 몇몇의 특수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만이 우리나라를 떠받치고 있다는 교만함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절대다수 민중의 힘을 깨닫지 못하는 우매함일 뿐이다. 노동운동이 마치 회사를 망치게 하는 듯이 몰아 부치고 있는 현실은 그런 사람들이 조작 유도시키고 있는 것일 뿐, 결코 진실은 아니다.”

감옥에서 민주노조 필요성을 역설했던 그는 2006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올해 일어난 현대차노조 파업, 건설노조원들의 포스코 불법점거 파업을 보면서 이들이 아직도 87년의 패러다임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며 자신의 과거를 부정했다.

당사자는 이미 고인이 됐지만 전태일 노동상을 주도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과거임이 분명하다.

88년 전태일 기념사업회도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불미스러운 일을 예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해 10월 작성된 ‘전태일 노동상에 대하여’라는 문서에는 “전태일 정신을 가장 훌륭히 구현했다고 판단된 단체나 개인이 운동조건의 엄혹함 때문에 변화돼 전태일 정신에 부합하지 못할 정도로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개인까지 포함해) 그 단체의 장래까지 예견해 책임진다는 뜻이 아니라 특정 기간, 특정 역할을 한 것이 전체 운동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명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수상 후보의 미래를 예상하거나 규정짓지 말고 현재에 미친 영향을 기준으로 하자는 취지다.





 

김학태  tae@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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