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노동뉴스> 얼굴은 표지다. 해당 시기 가장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을 담는다. 혹은 풍자한다. 편집·제작상 한계로 매일 바꾸진 못한다. 주간 단위로 제작하면서 시점상 조금 뒤늦게 반영되긴 해도 돌아보면 하나의 역사다.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간 <매일노동뉴스>가 어떤 사건에 주목했는지 표지를 통해 살펴봤다.<편집자>

 

2010년 1월1일 새벽 1시, 당시 175명의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을 둘러쌌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직권상정은 안 된다. 약속을 저버린 날치기”라고 고함치며 항의했다. 야당의 거센 반발에도 당시 김형오 국회의장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을 직권상정했다. 그리고 1시간 만인 새벽 2시께 야당을 제외한 한나라당 의원 전원이 투표해 173명의 찬성으로 의결했다. 사업 또는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규정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난 같은해 5월1일 새벽 3시,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근면위)는 한나라당이 날치기 통과시킨 노조법을 근거로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한도를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근면위는 ‘하후상박’을 명분으로 대기업노조 전임자수를 크게 축소했다.

<매일노동뉴스>는 2010년 5월4일자에서 당시 상황과 이후 전망을 보도했고, 표지 사진으로 이를 다뤘다. 표지를 보면 근면위 노동자 위원이었던 강승철(사진 아래 왼쪽) 민주노총 사무총장과 손종흥(사진 아래 가운데) 한국노총 사무처장이 허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장면이 눈에 띈다.

근면위는 타임오프 한도를 재설정하기 위해 3년마다 회의를 개최한다. 올해가 바로 회의가 열리는 해다. 6년 전 그날이 데자뷔 될까.

이미 데자뷔 된 사건도 있다. 2010년 1월28일자 표지 사진과 ‘갈 곳 없는 조선업 사내하청 노동자’라는 표지 제목을 보면 마치 내일 보도될 듯한 사진과 제목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본지는 6년4개월 전인 이날 조선업계 불황으로 대기업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3·4차 벤더나 물량팀처럼 열악한 고용환경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때부터 조선업계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노동자들은 더욱 열악하고 더욱 낮은 곳으로 밀려난 끝에 지금은 아예 갈 곳을 잃었다. 1937년 우리나라 첫 번째 건조 설비가 세워졌다는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내 기념비 앞 노동자들의 웃음(2010년 1월28일자 표지)이 역설적인 인상을 준다.

 


땅에 묻힌 이소선, 땅을 밟은 김진숙

2011년도 표지에서 주목받았던 사진은 인물이었다. 아들 전태일의 뜻을 이어 그보다 더 오랫동안 노동자와 함께했던 이소선 어머니가 그해 9월3일 영면했다. 향년 82세였다. 아들이 있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묻혔다. 전태일 열사 어머니로 22년, 노동자 어머니로 41년을 살아온 세월이었다. 사회 각계 대표자들과 노동자·시민 1만여명이 장례위원으로 참여했다.

고 이소선 어머니는 생전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죽기 전 양대 노총이 하나 되는 날이 올까?”라고 물을 정도로 노동자가 하나 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뜻에 따라 양대 노총은 고인이 묻히는 날까지 장례를 함께 치렀다. 함께 추모공연을 했던 양대 노총 노동자들이 이소선 합창단을 만들었다. 올해도 정기공연을 했다.

같은달 7일 영결식에는 모두가 하나 되라는 듯 두 팔 벌려 세상을 끌어안으려는 노년 시절 어머니 모습이 담긴 대형 영정그림(2011년 9월16일자 표지)이 등장했다. 그 뒤로 꽃상여가 따랐다.

어머니가 묻히기 하루 전날 그의 영정은 멀리 부산을 다녀왔다. 영정을 받아든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살아서 희망버스 타고 오신다더니 이렇게 만나러 오셨느냐”고 애통해했다. 그는 이날로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위에서 244일째 고공농성 중이었다.

김 지도위원은 이소선 어머니가 땅에 묻힌 후 65일이 지난 같은해 11월10일에야 땅을 밟았다. 그해 1월6일 35미터 높이 하늘에 오른 지 309일 만이었다.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긴 고공농성이었다. 희망버스가 다섯 차례나 부산을 찾았다. 한진중공업은 해고자 재고용을 약속했다.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던 날 영도조선소 본관 앞은 그를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김 지도위원은 “여러분이 나를 살렸다”며 웃었다. 목에 꽃다발이 걸렸다. 그날 그의 희망찬 외침과 309일간 머물렀던 크레인이 사진에 담겨 2011년 11월14일자 표지를 장식했다.

 

계획된 폭력과 노조파괴 그리고 창조컨설팅

집단폭력 동영상은 세상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간간이 영상을 뚫고 나오던 여성 노동자들의 비명 소리는 긴장감을 더했다. 2012년 7월27일 새벽 4시40분, 사측과 계약을 맺은 경비용역업체 컨택터스 소속 용역직원 300여명이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 SJM 공장 안으로 진입했다. 이들은 방패·헬멧·곤봉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공장 안에는 주간연속 2교대제 도입을 요구하는 금속노조 SJM지회 조합원 150명이 있었다. 여성을 포함한 30여명의 노동자가 컨택터스가 휘두른 폭력에 크게 다쳤다. 공장 밖에 경찰병력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제지하지 않았다.

비난·규탄 목소리가 들끓었다. 정치권에서는 국정조사를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공격적 직장폐쇄→용역투입·강제진압→친사용자 복수노조 설립→기존노조 파괴'라는 기획된 노조와해 공작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들끓는 여론에도 SJM에는 폭력사태 17일 만인 8월13일 제2 노조가 설립됐다. <매일노동뉴스>는 이 소식을 가장 먼저 보도하면서 용역깡패 폭력에 울분하던 금속노조 조합원들의 모습을 8월14일자 표지 사진으로 담았다. 불과 한 달 뒤인 9월에 열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청문회에서 창조컨설팅이 SJM·유성기업 등 기업에 노조파괴 컨설팅을 해 줬다는 사실이 드러나 세상을 경악케 했다.

그해에는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철탑에 오른 노동자들이 많았다. 현대자동차 비정규 노동자 최병승·천의봉씨는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울산 현대차 공장 인근 송전탑에, 쌍용차 해고자 한상균·문기주·복기성씨는 복직을 요구하며 경기도 평택 공장 인근 철탑에, 버스노동자 정홍근·택시노동자 김재주씨는 노조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전북 전주 종합경기장 조명탑에서 고공농성을 했다. 이들의 애절함은 2012년 11월12일자 표지에 담겼다.

 

공공성 일깨운 2013년 철도·진주의료원 파업

철도노조 역사상 최장기 파업이었다. 공공성을 확보하겠다는 노조의 외침에 국민이 화답하면서 가능했던 일이다. 철도노조는 2013년 12월9일 철도 민영화·수서발 KTX 분할에 반대하는 파업에 돌입했다. 국민적 지지가 이어졌다. 파업 돌입 11일째인 같은달 19일 서울광장에 2만개 촛불이 켜졌다. 시민들은 “민영화에 반대한다”며 “철도노조 힘내라”고 응원했다.

그러자 경찰은 같은달 22일 지도부를 검거하겠다며 병력 6천명을 동원해 서울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을 뒤졌다. 아무도 찾지 못했다. 촛불집회와 빈집을 뒤진 경찰의 10시간짜리 블랙코미디 소식이 2013년 12월23일자 표지에 고스란히 담겼다.

보건의료노조 진주의료원지부 파업은 철도노조 파업과 마찬가지로 공공성을 환기시킨 사건이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2013년 2월26일 수익성 악화를 문제 삼아 진주의료원 폐업을 결정했다. 의료원 노동자들과 시민·사회단체는 의료서비스 수준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의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의료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내용이 2013년 4월1일자 표지에 담겼다.

그러나 폐쇄는 강행됐다. 의료원 폐쇄에 반대했던 경남지역 노동·보건·시민단체는 올해 3월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 추진 시민운동본부를 구성하고 진주의료원을 대신할 지역공공의료원 설립을 추진 중이다.

끝나지 않은 노동개혁 그리고 공공기관 정상화

세월호 참사가 우리 사회에 던진 충격은 컸다. <매일노동뉴스>는 2014년 4월16일 전남 진도군 맹골수도에서 침몰해 단원고 학생을 포함한 295명의 생명을 앗아 간 참사를 잊지 않았다. 사건 발생 직후부터 국회 국정조사와 참사 100일 촛불집회, 진상규명 농성까지 그해에만 12회에 걸쳐 세월호 문제를 표지로 다뤘다. 한여름 8월에는 서울 광화문에서 농성이 이어졌다.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과 햇살을 가린 차양막 뒤로 바다를 제패해 나라를 구했던 이순신 장군이 우뚝 서 있었다.(2014년 8월22일자 표지)

2014년 4월2일에는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사진 왼쪽)과 신승철(사진 오른쪽) 민주노총 위원장이 나란히 앉아 ‘멈춰라! 가짜 정상화’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사진을 표지로 담았다. 정부가 공공기관 정상화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면서 양대 노총 공공부문노조들이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맞서 싸울 때였다.

이 싸움이 지난해 임금피크제에 이어 올해 성과연봉제 싸움으로 3년째 이어질지는 그때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양대 노총 공공부문노조 공대위는 정부 강압에 때로는 물러서고 때로는 서로 이견을 보였다. 그렇지만 2014년 4월 처음 싸움을 시작할 때처럼 여전히 서로의 옆자리를 지켜 주고 있다.

9·15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와 이튿날인 9월16일 새누리당의 비정규직 관련법 발의 그리고 이듬해 이어진 노사정 합의 파기까지…. 2015년은 노사정 협상과 정부·여당·청와대가 밀어붙인 이른바 노동 5법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이 끊이지 않은 해였다. 박근혜표 노동개혁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찢을 듯 움켜쥔 두 손(2015년 9월21일자 표지)은 당시 상황을 반영하면서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예측하는 듯하다.

올해 4·13 총선이 여소야대로 끝나고 19대 국회가 마무리되면서 노동개혁법 논란이 사그라지지 않을까 하는 전망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20대 국회가 개원하면 곧바로 노동 5법을 재발의한다는 입장이다. 청와대는 눈물까지 보이며 입법을 주장했다. 갈등과 대립은 20대 국회가 개원해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2015년 그나마 노동계에 희망과 웃음을 안겨 줬던 일이 있었다. 얼굴색과 생김새는 조금 다르지만 노동자들을 동지라 불렀던 이주노동자들이 무려 10년 만에 합법적인 노조를 갖게 됐다. 이주노동자들은 2005년 4월 서울경기인천이주노조를 설립했지만 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가입해 있다는 이유로 설립신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7년부터 법정 소송이 진행됐고 대법원은 8년 만인 지난해 6월25일 "체류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라도 노동 3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앞에서 두 손을 활짝 펴고 웃음 짓는 이주노동자들의 얼굴이 환하다.(2015년 6월30일자 표지) 그 위 하늘이 넓고 하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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