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산 참사 유가족들이 밀양 송전탑 공사에 반대해 농성 중인 평밭마을 주민들을 12일 오후 찾아와 격려했다. 윤성희 기자

지난 12일 새벽 밀양에 연대의 발길이 이어졌다. 한국전력공사가 재개한 송전탑 공사는 2주일째로 접어들었다. 민주노총 사무총국과 창원·울산지부를 비롯해 환경운동연합 등 환경단체, 울산시민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밀양 희망버스'를 타고 농성장에 합류했다. 주민들은 “앞으로 세워질 송전탑을 막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며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힘들어하는 어르신들, 정신적 트라우마 우려

<매일노동뉴스>는 이날 새벽 3시께 민주노총 희망버스 참가자들과 함께 산외면 금곡리를 찾았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765kV 신고리-북경남 송전선로 공사 4공구 현장'만 홀로 큰 조명을 밝히고 있었다. 이곳은 각 공사현장으로 자재를 실어 나르는 공급기지다.

4공구 현장 맞은편 비닐하우스를 개조한 움막에서 산외면 보라마을 주민 이상문(69)씨가 나왔다.

"아직 공사가 안 들어간 마을주민들이 여길 24시간 지키고 있어요. 그래도 수가 적어서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이 안 왔으면 벌써 철거당했을 거예요. 와 줘서 고맙습니다."

오전 7시께부터 주민 10여명이 공사장 맞은편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산외면 골안마을에서 온 강아무개(71)씨와 천춘애(50)씨는 “깨도 털고 사과나무 잎도 따 줘야 하는 바쁜 때이지만 집에 들어가도 일이 손에 안 잡힌다”고 입을 모았다.

인권단체들이 꾸린 ‘인권침해감시단’에서 활동하는 최민식 울산인권운동연대 대표가 사정을 설명했다.

"일상생활이 안 되죠. 경찰이 3천여명이나 들어왔잖아요. 109번 현장은 경찰들이 작은 농로까지 차단해서 주민들이 밤 따러 가는 것까지 막아요. 공사 반대에 적극적인 주민들의 동선을 감시하기도 합니다. 주민들이 경찰차 소리가 탱크소리로 들린다, 우리 동네가 전쟁터가 된 거 같다며 힘들어해요. 정신적 트라우마까지 우려됩니다."

경찰 뚫고 전해지는 '연대의 온정'

단장면 평리마을로 향했다. 송전탑 공사지로 오르는 길목엔 전경버스 5대가 서 있었다. 그들 너머로 자리를 깔고 노숙농성 중인 주민 20여명이 보였다. 위쪽 산길 입구는 전경들이 막고 있었다. 접근하는 사람에겐 채증용 캠코더부터 들이댔다.

주민들은 “경찰이 공사장에 못 가도록 막고 있다”며 “우리도 공사인력을 저지하기 위해 이달 3일부터 이곳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경찰과의 마찰이 잦았다. 고준일(71)씨는 지난 11일 경찰에 불법 연행을 당하기도 했다.

“경찰이 지나가게 비키래서 항의했더니 그냥 연행해 버렸어요. 연행한 경찰에게서 술냄새도 났어요.”

멀리 금빛 논들이 펼쳐졌다. 곳곳에 감이 붉었다. 고씨가 한숨을 쉬었다.

“노숙이 길어질수록 걱정이 많아져요. 다들 늙어서…. 농사일도 못하고 몸도 힘들고….”

조용하던 농성장이 울산시민연대 회원들과 정의당 울산시당 당원들의 방문으로 왁자해졌다. 울산시민연대 회원인 오영은(36)씨가 주민들과 음식을 나눴다. 아들 박준현(3)군도 함께 왔다.

"할머니들이 전에 먹고 싶다던 고구마를 삶아왔어요. 어르신들 고생하시는데 아기들 보면 좋아하실 거 같아서 애도 데려왔죠."

오씨는 "연대를 오면 어르신들이 반겨 주는 게 기쁘면서도 마음이 짠하다"며 "언론이나 다른 지역에서 밀양 송전탑 문제를 지역이기주의로 보는 게 안타깝고, 원전을 못 막아 낸 게 너무 미안하다"고 토로했다.

"외부세력 운운 말고 우리 마음 알아 달라"

오전 10시께 주민들 몇몇이“시청으로 가야 한다”며 일어섰다. 이날 밀양시청 앞에서 밀양시 사회봉사단체 협의회(공동대표 김태오·최화선)가 ‘불순 외부세력 척결을 위한 밀양·양산시민 총궐기’ 집회를 열 예정이었다. 이에 분개한 주민 100여명이 시청에 모여 항의한 끝에 집회는 무산됐다. 도망치듯 흩어지는 사회봉사단체 회원 30여명을 향해 상동면 여수마을 주민 김영자(57)씨가 외쳤다.

“주민들이 왜 한전의 방패막이가 됩니까? 진짜 외부세력은 주민들 괴롭히는 경찰과 한전입니다."

상동면 도곡마을 주민 김말해(86)씨는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송전탑 땅에 묻으면 되지 않소. 그렇게만 하면 내 편히 눈을 감겠는데….”

이날 오후에는 '핵 없는 사회를 위한 울산 시민공동행동' 회원 이상범(56)씨가 음식과 의약품을 챙겨 단장면 동화전마을을 찾았다. 한 명이 가까스로 다닐 만한 좁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길 30여분, 숲 속에서 주둔하고 있는 전경 30여명을 통과하니 작은 움막이 나타났다.

동화전마을 주민 정아무개(76)·이아무개(75)·전아무개(64)씨가 움막을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한 번 이곳까지 올라오면 기력이 다해 며칠은 못 내려가고 이곳에서 지낸다.

할머니들은 경찰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헬기가 와서 자재 내리는 거 봐도 경찰이 막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처음엔 몇 번 몸싸움도 했지만 힘에 부쳐요."(이아무개씨)

그래도 할머니들은 "싸움은 이제 시작"이라고 다짐했다.

"지금 네 곳에서 공사에 들어갔지만, 앞으로 50여개가 더 들어선다는데 그건 막아야지.”(정아무개씨)

“8년을 싸웠는데 더 못 싸우겠습니까. 송전탑 들어오면 우린 다 죽습니다.”(이아무개씨)

움막에서 나가려는 기자를 정 할머니가 쫓아 나왔다.

“기자님,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정말 공사를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강제로 해선 안 됩니다. 동네에 마을길 하나 만들어도 먼저 주민들 설득하고 보상도 하지 않습니까. 왜 우릴 설득하려 하지도 않고 공사부터 합니까.”

가슴팍까지 높아진 간절한 소원탑

움막 바로 위는 공사현장이었다. 한전이 세운 콘크리트 거푸집과 주민들이 파 놓은 무덤이 나란히 있었다. 그 옆에서 동화전마을 주민 김아무개(57)씨와 연대차 찾아온 통합진보당 당원들이 큰 돌을 모아 소원탑을 쌓아 놓았다.

“앞으로 연대하러 오는 분들, 등산오는 분들 모두 여기에 소원을 빌고 송전탑 막자는 마음도 모았으면 해서요.”

어느새 어른 가슴팍까지 높아진 소원탑 위로 잠자리가 한 마리 날아와 앉았다. 김씨는 안타까움을 쏟아냈다.

"우린 여기서 쫓겨나면 갈 데가 없어요. 얼마 더 살지도 못할 할매들이 오죽하면 이러겠습니까. 국민을 보호한다는 경찰들이 왜 주민들 마음은 보호해 주지 않나요?"

용산참사 유가족들도 부북면 평밭마을을 찾았다. 이들은 "밀양이 제2의 용산이 될까 봐 마음이 괴로웠다"고 했다.

“살려고 싸우는 사람들인데 정부가 대화부터 해야죠. 2009년 용산도 공권력으로 무작정 쫓아냈지만, 아직도 빈 공터로 방치돼 있잖아요.”(전재숙씨)

유가족들은 최근 용산참사에 책임이 있는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의 한국공항공사 사장 취임을 반대하는 농성을 벌이고 있다.

평밭마을 주민들은 산 위 공사현장에 무덤을 파고, 움막을 세웠다. 한옥순(66)씨는 유서를 품고 다닌다. 곽정섭(67)씨는 이미 자녀들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했다.

"내년에도 감 따고 살 수 있기를"

“공사 들어오면 내 몸에 휘발유를 뿌릴 거야. 내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투쟁하는 사람들한테 죽지 마라 캤는데, 이젠 내가 그 마음 알겠어. 이렇게 몰아붙이니 죽는 거구나 싶어”(한옥순씨)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두 할머니를 껴안았다. “그래도 살아서 싸워야죠. 죽는다는 소리 마세요.”(유영숙씨)

곽씨가 눈물을 흘리자, 옆에 있던 유가족 정영신씨의 눈도 젖어 들었다. “이렇게 나이 든 어르신들이 속에 칼을 품고 있다니…. 마음이 아파요.” 한참 서로의 손을 어루만졌다.

이날 저녁에는 밀양 시민단체 ‘너른마당’등 연대단체들이 주민들을 위해 위로잔치를 열었다. 보라마을 마을회관에서 자원봉사자들이 200인분의 부침개를 부치고 머리 고기를 날랐다. 주민들과 시민들이 섞인 가운데 막걸리가 돌고 웃음이 퍼졌다.

“우리 집 뒤에 떨어진 밤도 못 줍고 있는데 전남에서 온 무화과를 먹어 보네. 억수로 달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도 함께했다. “낮에 주민 분들 농사일 도왔어요. 같이 감을 따고 있으니까 이분들 삶 자체가 평화구나 싶더라고요. 묵묵히 농사지으면서 에어컨 한 번 안 켜고 산 분들이 왜 도시를 위해 희생돼야 하는지…. 이분들이 내년에도 감 따고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식사를 마치고 모두가 마을회관 앞에 촛불을 켜고 모여 앉았다. 이계삼 765kV밀양송전탑대책위 대표가 사회를 맡았다.

“오늘은 12일간 고생한 주민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자신감을 되찾는 자리입니다. 노래에 맞춰 ‘외부세력’분들이 주민들 어깨 주물러 주세요.”

밝은 동요가 흘러나오고 시민들이 할머니·할아버지의 어깨를 주물렀다. 평밭마을 할머니들이 우는 듯 웃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모두 서로의 어깨를 안고 다독였다.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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