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백화점의 '2013년 상반기 도급관리 현장점검' 문건. 고용노동부의 하도급 실태조사 설문지에 백화점측에 유리한 답안을 작성하도록 각 협력업체에 지시하고 있다.

제조업에서 고질적 문제로 여겨졌던 불법파견 문제가 유통업과 서비스업 등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대형마트업계 1위 이마트에 이어 백화점업계 2위인 현대백화점에서도 불법파견 정황이 포착됐다.

15일 <매일노동뉴스>가 은수미 민주당 의원과 시사주간지 <시사인>에게서 입수한 ‘13년 상반기 도급관리 현장점검’ 문건에 따르면 현대백화점은 본사 인재개발팀 운영지원파트를 중심으로 고용노동부의 하도급실태 관리·점검 조사에 교묘하게 대처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마트의 불법파견 논란이 불거지고 사회적 비난이 거세지자 대형 유통업체들이 황급히 빠져나갈 길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총 19매 분량의 해당 문건에는 현대백화점의 로고가 뚜렷이 박혀 있다. 각 장 서두에는 “본 문서는 현대백화점의 동의 없이 수정, 변경 및 복사할 수 없습니다. 개인정보 불법유출시 5년 이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라는 경고문구가 새겨져 있다

◇'원청 사용자성' 회피 모범답안 제시=해당 문건은 노동부의 하도급 점검이 들이닥쳤을 때 각 협력(하도급)업체와 협력업체 소속 직원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일종의 예행연습이다.

현대백화점은 지방고용노동청이 협력업체 직원들을 조사할 때 사용하는 서면설문지를 이용해 직접 ‘모범답안’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근무부서(장소)에서 원청 근로자와 혼재해 동일하거나 유사한 업무를 수행합니까”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하라는 식이다. “원청관리자의 구체적인 업무지시를 받아 근무하고 있습니까”라는 문항에도 “아니오”라고 답해야 한다.

현대백화점은 주관식 답변도 세세하게 제시했다. “귀하에게 직접 업무지시를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소속-○○산업개발”, “성명-○○○”, “직위-○○관리소장”, “지시방법-구두지시 등”과 같은 답변을 적시했다.

현대백화점은 노동부 근로감독관들이 찾아와 협력업체 직원들을 인터뷰할 경우도 대비했다. 감독관이 “현장에서 발생하는 보고서 또는 전표에 대해 누구의 결재를 받나요”라고 물으면, 협력업체 직원은 “업무일지와 보고서의 경우 현장소장(현장책임자)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습니다”라고 답해야 한다.

감독관이 “직원 출퇴근과 관련해 백화점 직원이 관여하지는 않습니까”라고 질문하면, 협력업체 직원은 “출퇴근 관리는 저희 사무실에서 하고, 근태는 현장소장이 확인합니다”라고 답해야 한다.

이는 원청업체인 현대백화점이 원청 사용자성을 일괄적으로 부인하는 내용이다. 현대백화점은 해당 문건에서 “설문지 내용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고 작성하는 사례가 다수 발생한다”며 “설문지 및 인터뷰는 2~3회 이상 현장관리자 주관으로 교육을 실시해 주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현대백화점은 이어 “교육 후 관련자료 폐기 요망”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이와 함께 △사무실 내 백화점 업무와 연관된 서류 파쇄 △백화점 결재가 끝난 품의서·보고서 파쇄 △백화점 조직도·비상연락망 파쇄 △백화점 결재판·파일 사용금지 △백화점 사훈·경영방침 부착시 파쇄 △인력 구인시 백화점 CI 사용 금지 등을 주문했다. 원청업체인 현대백화점이 협력업체들을 동원해 '원청 사용자성' 증거를 지우고자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굼뜬 노동부, 유통업 실태점검 백화점은 제외=이마트 불법파견 논란을 계기로 유통업계 전반에 대한 실태점검을 약속했던 노동부는 지난주 각 지방노동청에 관련공문을 시달했다. 지역별 주요 매장에 대한 실태점검에 나서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번 점검은 대형마트에 집중될 예정이다. 백화점에 대한 단속계획은 현재로서는 없다.

현대백화점의 문건이 시사하는 것처럼 노동부가 유통업 실태점검 계획을 밝힌 뒤 수개월을 허비하는 사이 유통업계의 위장도급·불법파견 증거들이 하나 둘 지워지고 있다. 노동자들이 법적으로 구제받을 가능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은수미 민주당 의원은 “제조업 불법파견 문제를 적정한 시기에 해결하지 않고 질질 끈 결과 이마트·삼성전자서비스·현대백화점 등 유통·서비스 분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며 “정부는 ‘사용자를 알 수 없는’ 최악의 일자리를 양산하는 기업들의 실태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위법사항이 발견되면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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