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은회 기자

“경영계는 숙원이었던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얻은 대신에 통상임금의 산정범위가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경영계가 통상임금 산입범위를 넓게 인정하는 법원의 판결에 반발하며 대법원 전원합의체를 통한 판례변경 등을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지금의 논란을 경영계 스스로 초래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 안 하면 돈 못 준다”는 경영계의 확고한 신념이 통상임금 판례 법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모든 임금은 소정근로의 대가"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 주최로 28일 오전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통상임금과 임금체계 개편’ 토론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도 교수는 “통상임금 판례 법리를 바라볼 때 간과해서는 안 되는 판결이 임금이분설을 폐기했던 9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라며 “그때까지 법원은 임금을 교환적 임금과 보장적 임금으로 구분해 노동자가 파업을 벌이면 보장적 임금은 지급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파업현장에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관철됐다”고 설명했다.

실제 95년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오기 전 법원은 노동한 대가로서의 ‘교환적 임금’과 복리후생 차원에서 덤으로 주는 ‘보장적 임금’이 따로 떨어져 있다고 봤다. 이른바 임금이분설이다. 그러던 중 “모든 임금은 하나다. 일 안 하면 돈 못 준다”는 경영계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임금이분설은 폐기됐다.

도 교수는 “전원합의체 판결의 핵심은 모든 임금은 소정근로의 대가이며, 교환적 임금과 보장적 임금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라며 “판결이 나온 뒤 기존에 교환적 임금을 기준으로 산정됐던 통상임금 판례 법리가 바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법원이 이러한 판례 법리에 대한 일관성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통상임금의 범위가 확대되는 판결이 잇따랐다는 것이다.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키는 내용의 판결 역시 연장선에 있다.

도 교수는 “비용부담 등의 이유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는 것에 거부감을 드러낸 일부 하급심 판결이 있는데, 이들 판결은 대부분 상급심에서 기각됐다”며 “통상임금에 대한 법원의 판단에 일관성이 결여됐다는 지적은 잘못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경영계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얻는 대신에 통상임금 범위가 확대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 셈이다. 도 교수는 근로기준법 개정 등으로 통상임금의 범위를 명확하게 하자는 입법적 논의에 대해서도 “이미 발생한 통상임금 청구권을 소멸시키거나 그 내용을 변경할 경우 위헌에 해당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고, 근로기준법의 입법취지가 종속적 지위에 있는 근로자에 대해 국가가 헌법에 기초해 인간다운 근로조건을 규정하고 그에 대해 강행성을 부여한 것이라는 점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 설명했다.

"변호사만 배불리는 통상임금 줄소송 막아야"

현재의 통상임금 논란이 노사 간 신뢰를 흔들고 변호사나 노무사들의 호주머니를 채워 주는 결과를 부를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최영기 경기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금과 같은 이익다툼의 공방이 거듭되면 개별 사업장 노사는 불신과 갈등의 소용돌이에 더 깊이 빠져들 것”이라며 “개별 근로자들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수익을 실현하기 위해 점점 더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게 될 것이고 법률시장은 때 아닌 호황을 구가하며 근로자들을 소송의 길로 유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 연구위원은 또 “기업들도 통상임금이라는 ‘우발적 채무’를 최소화하기 위해 소송비용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산업현장에 노사가 사라지고 법률가들의 다툼만 난무할 것이라는 우려다.

최 연구위원은 이와 관련해 노사 대타협을 통한 해결을 주문했다. 그는 “노사관계는 일회적인 게임이 아니라 반복게임(repeated games)이라서 일방적인 승리를 갈구할수록 서로 손해를 보는 구조”라며 “한 번의 일방적인 승리는 다음번의 게임에서 상대방의 복수를 각오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어려운 처지를 악용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노사 양측의 대승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최 연구위원은 “가장 바람직하고 시급한 노사의 행동은 노사가 대타협을 통해 해법을 마련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개별 사업장들이 줄소송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지 않도록 권고하는 것”이라며 “이 같은 대타협의 리더십이 발휘된다면 폭넓은 사회적 지지가 뒤따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가 사회적 타협이 가능한 여건을 마련해 줘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최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노조들은 과거 국가와 사회를 위한 대타협에 나섰다가 자신의 리더십이 붕괴하는 것을 경험했고, 이는 조직의 분열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며 “특히 지난 5년 동안 이명박 정부의 일관된 노동경시 태도로 인해 양대 노총의 리더십이 크게 약화됐다”고 진단했다. 최 연구위원은 이어 “박근혜 정부 5년의 타협체제는 무너진 사회파트너십의 기반을 강화하고 노조의 리더십이 강화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확고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참에 임금체계 단순하게"

통상임금 논란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복잡한 임금체계를 단순하게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통상임금 문제의 핵심은 수당과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킬지 여부와 임금 지급주기를 연 단위까지 확대할 것인가로 요약된다. 기업들이 임금구조와 체계의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수당을 도입해 온 것이 현재 진행되는 통상임금 논란의 중요한 원인이 됐다.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경영학부)는 “수당의 명칭과 개념을 정비해 단순화하고 이에 근거해 임금의 통상성을 결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며 “반면 지침에 의해 판단하기 어려운 기업특수적 수당 항목의 통상임금 포함 여부는 고용계약이나 단체교섭을 진행할 때 노사가 자율적으로 합의해 결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설명했다.

권 교수는 상여금에 대해서도 “업적과 관련 없이 고정적이며 일률적인 성격을 갖는 상여금의 경우, 즉 상여금이 기본임금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기본급에 흡수·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상여금의 활용은 기업이나 개인의 업적이나 성과를 유인해 내고자 하는 경우에 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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