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쪼잔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대니얼 애커슨 지엠 회장의 대화 말이다. 매년 920만대 이상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미국 제조업 상징 지엠의 회장과 세계 5위 자동차 생산국가인 한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한다는 대화가 기업이 떼먹은 임금을 퉁칠 방법이라니.

통상임금 문제는 법리상 통상임금에 포괄되는 임금항목을 둘러싼 다툼으로 쟁점화됐지만 사실 핵심 쟁점은 한국의 저임금-장시간 노동체제에 관한 문제다. 한국 제조업 임금체계의 경우 기본급을 적게 유지하며 각종 수당과 상여금을 계속 확대해 왔는데 사용자가 시간외노동을 싸게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면 매출 15조원의 대기업 한국지엠에서는 근속 33년이 돼야 월 기본급이 200만원이 된다. 신입사원의 기본급은 150만원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잔업·특근수당과 연월차수당 등 노동시간을 늘려 소득을 보충해야 하고, 상여금과 성과급 등이 있어야만 그나마 저축이라도 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 약간의 정도 차이만 있지 제조업 대기업 대부분이 비슷한 실정이다. 제조업 생산직들이 통상적으로 받는 임금은 대부분 40%도 되지 않는다.

중소·중견기업 노동자의 경우 잔업특근 의존도는 더욱 심각하다. 평택에서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D사 노동자의 경우 기본급이 122만원인데, 잔업·특근 없이 한 달을 보내면 각종 세금을 공제하고 집에 가져가는 돈이 80만원에 불과하다. 이 기업은 연간 매출액이 4천억원을 넘는 현대자동차 1차 벤더다. 주변 은행에서 대기업으로 분류하는 이 기업의 노동자들은 월 250시간 가까이 일해야 200만원 조금 넘는 돈을 집에 가져갈 수 있다.

기본급이 낮다 보니 노동자는 적정소득을 올리기 위해 잔업·특근수당과 연차수당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사용자는 더 일하게 해 달라는 노동자들을 기본급이 낮아 수당도 얼마 되지 않는 시간외수당을 지불하고 잔업특근을 시킬 수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장시간 노동체제를 유지시켜 온 핵심이었다.

회사는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마음껏 늘릴 수 있으니 생산 증대를 위한 자본투자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저임금을 보완하기 위한 장시간 노동으로 건강과 여가, 심지어 가족까지 빼앗긴다.

애커슨 회장과 박근혜 대통령이 통상임금 문제에 불을 붙였는데, 차라리 잘됐다. 이번 기회에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이 시간외근로 수당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저임금·장시간 노동체제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나치게 낮은 최저임금과 시급제·일급제 등 임금체계의 불안정성, 값싼 시간외근로수당 등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을 강제하는 조건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해야 한다.

주 40시간만 일해도 충분하게 생활할 수 있는 임금조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다면 조직된 노동자 일부가 소송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볼 수는 있겠지만 90%의 조직되지 않는 노동자 다수는 오히려 현장에서 많은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

한 예로 통상임금 소송이 시작된 이후 산업공단에서는 포괄임금제라는 명목으로 통상급여 성격이 있을 것 같은 수당을 없애고, 노동시간 역시 연단위로 정해 놓고 마음대로 잔업·특근을 부려먹는 사업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여금 역시 정률적·일률적 기준을 벗어나기 위해 생산 인센티브 성격으로 바꾸는 사업장도 있다.

노동운동의 통상임금 관련 대응은 체불임금 소송에서 임금체계와 저임금 구조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해야 한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