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4월 한·EU 자유무역협정(FTA) 무역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EU 집행위원회 통상담당 집행위원이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과 면담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우리나라가 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시 지키기로 한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 노력을 하고 있는지 여부를 점검한 전문가 패널이 “한국이 협정문을 위반한 바 없다”고 판단했다. ILO 기본협약 비준을 위해 한국 정부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 패널 “한국 정부 비준 노력” 보고서 제출

박화진 고용노동부 차관은 25일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이 같은 내용의 한·EU FTA 전문가 패널 보고서 결과를 브리핑했다. 유럽연합은 한국이 ILO 기본협약 비준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한·EU FTA 조항(13장 무역과 지속가능 발전)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며 2018년 말 분쟁 해결 절차에 돌입했다. 이듬해 7월 분쟁 마지막 절차인 전문가 패널 소집을 요청했다. 한국·EU·호주 3자로 구성된 전문가 패널은 코로나19 확산으로 논의를 연기하다 지난해 10월 심리를 시작했다. 같은해 11월25일까지 각국 상황을 기준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지난 20일 한국과 EU에 제출했다. 양쪽은 보고서 원문을 이날 오후 정부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정부는 유럽연합이 분쟁 해결 절차에 돌입하자 통상마찰을 촉발하지 않기 위해 ILO 기본협약 비준에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미비준한 기본협약 4개 중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의 적용에 관한 협약(98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87호) △강제 또는 의무 노동에 관한 협약(29호) 등 3개 협약 비준과 이를 위한 법 개정을 추진했다. 국회는 지난달 9일 본회의를 열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공무원노조법)·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교원노조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기본협약 비준을 위한 최소한의 내용을 담은 법안이다.

개정 노조법, 전문가 패널 권고안 충분히 반영 안 돼

전문가 패널 보고서는 노동법이 국회를 통과하기 이전 상황을 반영해 작성됐다. 국제노동기준 준수를 구속력 있는 의무라고 판단한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에 따라 세 가지를 권고했다. 특수고용직 등 자영업자와 해고자·실직자 등 모든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 노조임원 자격을 노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할 것, 노조 설립신고제도 개선 여부를 양국이 추가 논의하라고 권고하는 내용을 담았다.

구체적으로 근로자 개념을 규정한 노조법 2조1호, 노조의 결격사유를 규정한 같은 법 2조4호 라목을 결사의 자유 원칙에 부합하도록 보완하라고 했다. 노조임원을 조합원 중 선출하도록 한 노조법 23조1항을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유럽연합이 문제 삼았던 노조 설립신고제도 운용은 협정문 위반으로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렸지만 양측이 협의기구를 구성해 추가 논의를 하라고 적시했다.

개정 노조법은 이 같은 전문가 패널의 권고 중 일부만을 충족했다. 노조법 2조4호 라목의 단서조항만 삭제하고, 2조1호는 그대로 뒀다. 근로자 개념을 넓히지 않고 대신 노조 가입범위만 넓히는 우회로를 택했다. 산별노조는 스스로 임원을 선출할 수 있도록 했지만 기업별노조 임원 자격은 해당 기업에서 일하는 조합원으로 제한했다.

박 차관은 “노조법상 근로자 개념은 매우 폭넓게 규정돼 있어 특수고용직의 노조 설립과 가입을 인정하는 데 문제가 없고, 기업별노조 임원 제한은 국내 특수성을 고려한 조치로 ILO도 이를 이해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패널 권고 중 두 가지는 법 개정으로 이행됐다고 판단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차원에서 노조법 추가 개정을 추진하지는 않겠다는 의미다.

노조 설립신고제 문제 다룰 한·EU 협의기구 설치될 듯

노조 설립신고제도 추가 논의는 양국 간 논란의 불씨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노조법상 근로자가 아닌 이가 조합원 명단에 포함되면 노조 설립신고서을 반려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노조법 2조1호 근로자 개념과 연동해 운용하고 있다. 노동계와 다수 전문가는 이 같은 노조 설립신고제가 결사의 자유를 위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 정부는 전국건설노조·공공운수노조에 특수고용직이 조합원으로 가입하지 못하도록 규약을 변경하라는 취지의 자율시정명령을 내린 상태다. 대리운전노조는 설립신고증을 받기 전 ‘노조’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노조법 위반 벌금형을 받았다. 노동부는 이 같은 노조 설립신고제를 존속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박 차관은 “설립신고를 받은 노조는 노조법에 따라 상당히 두텁게 법적 보호가 되고 있다”며 “근로자성을 판단할 수 있는 제도나 절차가 마련될 때까지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운영하더라도 제도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노조 설립신고를 받으면 노조법에 따른 결격요건이 있는지를 신속히 심사하고, 신고증을 빨리 내주는 방향으로 제도를 운용하겠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전문가 패널 권고에 따라 유럽연합과 추가 논의를 진행하고 설립신고제 개편방향에 대한 연구용역·사회적 대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정부 “2월 임시국회서 ILO 협약 비준동의 추진”

정부는 ILO 기본협약 비준안 국회 통과를 조속히 추진하기로 했다. 국회 국방위원회에 계류된 4급 보충역 대상자에게 복무선택권을 부여하는 병역법 개정안과 외교통일위원회에 계류 중인 3건의 비준안 처리를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박 차관은 “노조법을 개정했지만 비준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FTA 위반 논란이 또 불거질 여지는 있다”며 “2월 임시국회에서 외교부와 협력해 3개 비준안이 본회의에서 의결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노동계는 개정 노조법이 전문가 패널 권고를 전부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나타냈다. 민주노총은 성명에서 “노조 설립신고제가 허가제로 운영되고 있는 문제를 해소하지 않으면 유럽연합의 문제제기는 지속될 수밖에 없으므로 법 개정을 시급히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지현 한국노총 미디어홍보본부 실장은 “개정 노조법이 전문가 패널 보고서 권고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양대 노총은 이날 오후 공개되는 보고서 전문을 분석해 26일 입장을 내놓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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