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법원이 사업주의 안전·보건조치의무 위반으로 노동자가 숨지고, 유사한 사고가 반복해 발생하면 엄하게 처벌하는 양형 기준을 제시했다. 다수 피해자가 발생하거나 유사한 사망사고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면 징역형을 최대 10년6월형으로 늘리고 처벌 감경을 어렵게 했다. 그렇지만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을 독립된 범죄로 보지 않고 과실치사상범죄로 규정해 기업 처벌이 아닌 개인 처벌로 마무리되는 문제를 개선하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법원 양형위 3월29일 새 양형기준 의결

12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 11일 전체회의에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범죄 양형기준 설정 범위를 확대하고, 형량 범위를 대폭 상향한 ‘과실치사상·산업안전보건범죄 양형기준’ 수정안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양형위가 내놓은 수정안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망사고에서 권고 형량을 기존 보다 높였다. 재판에서 감형하는 사유인 ‘감경인자’ 범위는 축소하고, 처벌을 높이는 ‘가중인자’는 추가하거나 정비했다.

먼저 ‘상당 금액’을 공탁하면 형량을 줄여 주던 관행을 폐지한다. 사업주나 가해자가 피해자측에 위로비 등을 지급하면 재판에서 형량 감경 요인으로 반영하던 관행이 사라진다. 피해자 유족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일정 금액을 공탁하고 이를 근거로 감형을 받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산업재해 예방조치를 소홀히 해도 괜찮고, 사고가 난 뒤에 수습만 하면 된다는 일부 사업주의 그릇된 인식을 개선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반면 자수나 내부 고발, 사고 실체를 자진해서 밝히면 감경해 주기로 했다. 사고 책임이 있는 이들의 수사협조를 유도하려는 조치다.

유사한 사고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거나, 다수 피해자가 발생했을 때는 각각을 특별가중인자로 규정해 가중처벌한다.

사망사고 권고 형량범위도 상향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보건의무조치 위반 치사죄의 형량은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이다. 그런데 재판부는 기본범죄의 경우 6월~1년6월 사이에서 판결하고 있다. 사업주 귀책 등이 확실하고 다수가 사망했을 때 권고 형량은 10월~7년10월15일이다. 양형위는 이를 각각 1년~2년6월, 2년~10년6월로 확대했다. 기존에는 5년 이내 재범일 경우라도 가중처벌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3년~10년6월로 가중처벌한다. 죄질이 좋지 않은 반복 사망사고 혹은 다수 사망사고는 법정 최고형인 7년을 선고하도록 권고한다.
 

▲ 자료사진 <노동부>
▲ 자료사진 <노동부>

반복 범죄, 다수 피해 발생시 가중처벌
기업범죄 아닌 주의의무 위반으로 보는 시각 여전

양형위의 이번 수정안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에 따른 사망사건을 업무상 과실치사상범죄로 보는 기존 시각을 유지한 속에서 나왔다. 개인의 주의의무 위반으로 발생한 범죄지, 기업범죄로 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산업안전·보건조치를 실제 결정하는 사업주 등 최고 경영진은 처벌하지 못하고 안전관리책임자 등 실무진 처벌에 그치는 한계는 개선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권고 형량을 높였지만 집행유예가 가능한 3년형이 범위에 포함된 점도 한계로 꼽힌다.

벌금형 기준도 빠졌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본부에 따르면 현재 사건당 평균 벌금 규모는 450만원 수준이다. 운동본부는 이날 성명을 내고 “양형위의 기준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찬성하는 국민 여론이 70%를 넘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솜방망이 처벌로 그치는 문제를 개선하기에 역부족”이라고 지적했다.

노동계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법원뿐만 아니라 검찰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에 따르면 2019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건 중 검찰이 구약식(약식명령) 청구한 사건은 1만1천693건이다. 정식 재판에 넘긴 사건은 646건(구속 4건)에 불과했다. 대부분 산재 사건에서 법원에 벌금형을 처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양형위는 이번에 제시한 기준안에 대해 정부·연구기관·시민단체 등의 의견을 청취하고, 다음달 5일 공청회를 개최한다. 모인 의견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3월29일 전체회의에서 양형기준을 최종의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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