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3년 3월6일 정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열린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 고 황유미씨의 6주기 추모제 및 반도체 전자산업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 기자회견이 열렸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산재 카르텔’이 논란이다. 이주환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국정감사에서 ‘산재 추정의 원칙’과 ‘산재 환자 전용 특별수가’ 도입 등이 산재 부정수급자 증가, 산재기금 부실화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했다. 고용노동부는 국감이 끝난 직후 근로복지공단 특정감사에 나섰고 공단은 경영 적자 때문에 ‘부정한’ 특별수가를 개설한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리고 있다.

노동부는 지난 13일 “산재 카르텔을 뿌리뽑기 위해 감사 강도를 높이겠다”고 밝혔다. 감사 범위도 “산재승인 및 요양 업무 전반의 제도·운영상 적정성”까지 넓혀 광범위하게 살피고 있다. 최종 감사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산재 카르텔의 존재를 확정한 것이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국경총은 “묻지마식 보상으로 산재보험제도 근간 흔들린다”며 ‘산재보험 업무상질병 제도운영 개선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일련의 흐름을 보면 ‘산재 카르텔’의 종착점은 산재보험 제도 후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매일노동뉴스>가 ‘산재 카르텔’ 주장의 주요 근거들을 분석하고, 우리나라 산재보험 제도가 나아갈 길에 대해 세 편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주>

“역학조사 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에 제가 어떤 환경에서 일했는지 눈으로 못 봤잖아요. 업무상 상관관계를 왜 내가 입증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미연(50·가명)씨는 1991년부터 2015년까지 24년간 삼성전자 수원·기흥 공장에서 일했다. 입사 후 7년 가까이 플라스틱 기판에 전자부품을 납땜하는 업무를 했다. 제대로 된 안전장치 없이 연기를 온종일 마셨다. 이후 웨이퍼 관리, 방사선 검사 업무 등을 담당했다. 약품에서는 냄새가 났다. 몸은 이상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어지럼증, 코피가 한 번 쏟아지면 멈추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결국 그는 2011년 재생불량성빈혈을 진단받았다. 2015년에는 골수이형성증후군을 추가로 진단받았다. 골수이형성증후군은 중증 혈액질환으로 백혈병 진행전 단계로 본다. 치료를 위해 휴직하던 그는 2018년 회사를 떠났다. 2020년 9월 뒤늦게 산재를 신청했다. 3년이 지나 올해 9월 얻은 결과는 불승인이었다.

삼성전자 직업병 사태를 계기로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노동자의 백혈병 등을 신속하게 산재 판정할 수 있도록 산재추정의 원칙이 시행됐지만, 문턱은 높았다. 일하다 병든 노동자는 자신이 수행하던 업무와 질병 간 연관성을 증명하는 책임을 오롯이 감당했다.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소수의 부정수급 사례가 아닌 현행 산재보험 제도가 가진 사각지대다.

“24년간 납땜, 화학물질 냄새
맡으며 일해도 산재 불인정”

고용노동부는 2018년 반도체·디스플레이 노동자의 직업성 암 등 희귀질환에 대한 추정의원칙 기준을 마련했다. 백혈병·다발성경화증·재생불량성빈혈·난소암·뇌종양·악성림프종·유방암·폐암 등 8개 상병은 역학조사를 생략하고, 동일·유사공정 조사 여부를 조사해 산재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노동부는 “8개 상병 이외에도 법원 등을 통해 업무관련성이 인정되는 사례가 추가되면 해당 상병을 추가해 개선된 절차를 따르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진전은 없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이미연씨의 산재 신청에 “6년7개월간 납땜 작업 수행 이력은 확인되나, 납땜 작업이 온도 특성상 금속흄 노출이 미미하고, 상당한 수준의 납 노출을 추정해도 질병과의 연관성의 증거가 부족하다”며 불승인했다.

산재 신청 후 3년을 기다린 이씨는 망연자실했다. 그는 “제가 건강하지 않았다면 삼성전자에서 애초에 뽑지 않았다”며 “빈혈이 있던 것도 아니고, 화학물질에 계속 노출된 이후부터 코피가 나면 멈추지 않았는데 역학조사는 2000년대 이후 (작업환경측정) 수치로만 추정해 불승인 판정을 내리는 게 말이 되냐”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는 행정소송을 준비 중이다. 이종란 공인노무사(반올림) “납은 혈액독성물질이고, 이씨가 다룬 기계(V-SEM)는 방사선 기반의 검사설비로 혈액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며 “위와 같은 작업을 한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한 여성노동자도 백혈병으로 산재를 인정받은 사례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미연씨는 2011년 1월 이전 입사자, 1996년 1월 이후 퇴직자, 재직기간 1년 이상 등 추정의원칙이 규정한 근무이력도 충족한다. 하지만 질병과 공정 간 상당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산재추정의 원칙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정부 연구용역 결과도
“근골격계 질환 추정의 원칙,
주상병 넘어 유사상병에도 확대해야”

조선소 사상(마감)공으로 20년째 일해 온 김장훈(52·가명)씨는 산재요양 신청 결과를 기다리던 시간을 떠올리며 “사람이 사람 같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인 그는 “사회보험 체납에 대출도 막힌 상태인데다 임금체불, 폐업 등으로 여유자금이 없었다”며 “승인 판정이 있기 전 4~5개월은 진짜 너무 ‘사람이’ 견디기 힘들었다”고 부연했다. 그의 말 속에서 일하다 아픈 사람이라면 응당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면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느낀 처참한 심정이 응축됐다.

사상공은 그라인더로 철판의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는 업무를 수행한다. 그라인더의 진동이 어깨, 목, 팔꿈치, 허리, 무릎 등에 전달돼 근골격계에 무리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지난해 11월 그의 신체에도 참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다. MRI 촬영으로 좌측 견관절 유착성 관절낭염·견관절 극상근염·충돌증후군 등 9개 질병을 진단받았다.

지난 2월 산재를 신청했지만 4개월 뒤 그는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시민사회단체의 도움으로 근로복지공단에 항의한 끝에 왼쪽 견관절 와순파열 한 건만 승인됐다. 그가 20년 넘게 일해 얻은 질병은 ‘불행히도’ 근골격계 추정의원칙 대상 질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시행된 노동부 고시에 따르면 10년 이상 일한 조선소 사상공은 어깨(회전근개 파열), 목(경추간판 탈출증), 팔꿈치(내(외)상과염), 허리(요추간판 탈출증), 무릎(반월상 연고파열)만 인정된다. 주상병 외 유사상병이 아예 포함되지 않는 점은 근골격계질환 추정의 원칙 고시 제정때 부터 노동계가 지적했지만, 반영되지 않고 있다.

정부가 지난 3월 내놓은 ‘근골격계 질병 추정의 원칙 적정성 및 개선방안 마련 연구’를 보면 별표2의 개정을 제안한다. 별표2는 주상병 외 동반신청 가능상병을 명시한 것으로 고시 제정 당시 재계의 반대로 제정되지 못했다. 부산대학교 연구진은 “별표2의 개정이 이뤄진다면 어깨의 경우 2천578건이 추가로 추정의 원칙 적용 대상이 될 가능성이 발생한다”고 덧붙였다. 별표2 개정안에 따르면 어깨 부위 근골격계 질환은 회전근개 파열뿐 아니라 충돌증후군, 상부관절와순 파열, 점액낭염 등 사상공 김장훈씨의 질병이 대부분 포함된다.

현미향 중대재해없는세상만들기 울산운동본부 공동집행위원장은 “경총에서 추정의 원칙 도입 자체를 문제 삼으니깐, 추정의 원칙 대상 상병이나 직종 확대 문제가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속성 폐지, 노무제공자 도입에 일보 전진
… 부당한 휴업급여 산정기준 여전

현행 산재보험 제도가 다양한 고용형태를 담지 못하는 점도 문제다. 지난 7월 개정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은 특수고용종사자 대신 노무제공자 개념을 도입했다. 노무제공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사업을 위해 자신이 직접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보험설계사·대리운전기사·퀵서비스 기사 등 대통령령이 정한 18개 직종만 해당된다. 직종을 정하고 제도를 적용하는 방식은 사각지대를 낳을 수밖에 없다. 특수고용직인 교통사고조사원이나, 간병노동자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 노무제공자에게 적용하는 산재보험 제도도 낮은 휴업급여, 좁은 업무상질병 인정범위 등 나아갈 길이 멀다.

음식배달 중 지난 6월19과 9월26일 두 차례 교통사고를 당한 김기욱 공공운수노조 라이더유니온지부(지부장 구교현) 조합원은 최근 산재를 인정받은 뒤 받은 ‘1일 기준 4만원’인 휴업급여를 보고 망연자실했다. 노무제공자의 휴업급여는 최근 3개월 평균임금을 기준으로 책정하는데, 6월 첫 교통사고로 산재요양급여를 받던 두 달간 임금은 ‘0원’으로 책정됐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는 “업무 외 부상이나 질병, 그 밖의 사유로 사용자의 승인을 받아 휴업한 기간”은 평균임금 산정 기간에서 제외되는데, 노무제공자는 해당 규정이 적용되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다. 개정 전 특수고용직 특례가 적용됐을 때는 최저임금(월 209시간 근무 기준) 수준의 휴업급여를 받았는데, 노무제공자 규정이 적용된 후에는 이보다 훨씬 하회하는 수준의 임금을 받게 된 것이다.

구교현 라이더유니온지부장은 “휴업급여 수준이 최저임금 수준도 되지 않는다면 다쳤을 때 충분히 치료받으면서 쉬기 어렵다”며 제도 개선을 주장했다.

업무상질병 인정범위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구 지부장은 “라이더들은 적지 않은 무게의 헬멧을 일상적으로 쓰고, 오토바이를 타는 동안 방지턱과 바닥의 진동 등을 그대로 전달받아 허리와 어깨, 손목 등 무리가 간다”며 “고객과 상점주와 마찰 등 감정노동과 직무 스트레스도 가중되면서 우울감도 크다”고 말했다.

“버티고 버티다 신청한 산재
승인 거부는 부당” 노동자의 하소연

산재노동자들은 말한다. “조선소에서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는 일 안 하면 뭐 먹고 사나요. 아픈 몸 참아가며 일하는 노동자가 80~90%인데, 버티고 버티다가 신청한 산재를 불승인하고 추정의 원칙도 적용하지 않는 관행은 부당해요.”(20년차 사상공 김장훈씨)

“입사 전에 건강하지 않았다면 이해를 하겠어요. 그런데 매우 건강했거든요. 내가 왜 이렇게 아프게 됐을까요. 산재신청은 생각도 못하고 죽어간 사람은 더 많았겠죠.”(전 삼성전자 노동자 이미연씨)

엄격한 기준 탓에 노동자는 산재 승인을 기다리다 죽어가기도 한다. 이달 4일 고인이 된 최진경 전 삼성디스플레이 기흥연구소 연구원은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사망했다. 2018년 8월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은 뒤 2019년 4월 공단에 산재를 신청했지만 공단은 올해 7월 업무관련성이 낮다고 불승인 했다.

산재 국가책임제 주장의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산재 국가책임제는 국가가 재해조사 기간을 도과하고도 승인 여부를 결론 내리지 못하거나, 원인불명의 희귀질환이나 업무와 재해 사이 인과관계에 대한 의학·과학적 연구가 미흡한 경우에 국가가 근로복지사업의 일환으로 산재보험을 우선 적용하는 것이다.

올해 노동부 국정감사에서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산재 선보장을 담은 법안 발의에 여당인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이 수긍하면서 다음달 5일 해당 법안에 대한 공청회가 열린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대표(직업환경의학의)는 “산재 카르텔이나 도덕적 해이 주장은 정작 중요한 개혁과제를 지워버린다”며 “가장 중요한 개혁과제는 산재 처리 과정에 있어서 장벽을 없애고 환자의 증명 부담을 덜고 휴업급여·장애급여 같은 급여 수준이 적절한지 검토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활동가(직업환경의학의)는 “현재 산재보험 제도는 직업병, 특히 직업성 암을 비롯한 희귀질환의 인정률이 굉장히 낮다”며 “무엇보다 4년 혹은 6년을 기다려 불승인 판정을 받는 노동자 입장에서는 제도의 신뢰도가 떨어진 상태”라며 개선을 요구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