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과 세계

“저희를 ‘나이롱 환자’ 취급하는 것에 화가 납니다. 저희는 ‘나이롱’이 아니라 진짜 아픈 거예요.”

삼성전자 LCD사업부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린 한혜경씨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질병을 산재로 인정받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1995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입사한 한씨는 2005년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생산직 오퍼레이터로 근무하면서 납과 플럭스(납땜시 접착부 보호용제)·유기용제 등에 노출된 탓이다. 뇌종양을 수술로 제거했지만 후유증으로 시각·보행·언어 장애가 생겼다.

한씨는 2009년 산재 신청을 했는데 6차례나 불승인됐다. 최초 신청 후 10년 만인 2019년 결국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받았다. 한씨는 “매달 산재 장해연금을 받는데 연금 덕분에 그나마 생활이 안정되고 자존감도 조금 회복됐다”고 말했다. 혜경씨 어머니 김시녀씨는 “10년 동안 산재인정을 하지 않는 공단을 상대로 싸우면서 우리를 ‘가짜’ 취급하고 함부로 대하는 태도에 눈물도 많이 흘렸다”며 “산재 인정은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으로, 더 많은 피해자들의 산재가 인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재 당사자와 가족, 노동·시민·사회단체는 21일 오전 서울 중구 금속노조 회의실에서 ‘산재환자 모욕하는 윤석열 대통령 규탄 긴급 증언대회’를 열었다.

추정의 원칙 탓에 산재승인 남용?
근골격계 질환 적용 3.7%에 불과

지난 국정감사를 기점으로 정부와 여당은 산재보험 재정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여당 의원이 “나이롱 환자 견제장치가 사라졌다”며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자 고용노동부는 국감 직후 공단을 상대로 특정감사에 착수했다. 이정식 노동부 장관은 “감사를 통해 느슨한 산재승인과 요양관리에서 비롯된 이른바 ‘산재 카르텔’ 문제를 뿌리 뽑아 산재보험기금의 재정 부실화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소하겠다”고 밝혔다.

여당 의원과 대통령실 관계자 발언을 종합하면 보험금 착복 구조의 원인으로 산재추정의 원칙이 지목된다. 산재추정의 원칙은 작업기간·노출량 등에 대한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반증이 없는 한 업무상질병으로 인정하는 제도다. 산재 처리 기간을 단축하고 산재노동자의 입증책임 부담을 완화하려는 취지로 도입됐다. 2017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시행령으로 법제화됐다.

이날 증언대회에 참석한 노동자들은 정부·여당 주장에 반발했다. 마치 산재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면서 산재승인이 남발되고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산재추정의 원칙이 지나치게 협소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근골격계 질환의 경우 8대 상병이 대상인데 직종·근무기간·유효기간에 대한 일정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실제로 지난해 근골격계 산재신청 건수(1만2천491건) 중 추정의 원칙이 적용된 건은 3.7%(468건)에 불과하다.

오동영 금속노조 한국타이어지회 부지회장은 “한국타이어 노동자들은 생산현장의 모든 공정에서 작업자의 모든 신체부위를 이용해 정형작업과 비정형작업을 해야 한다”며 “이 작업이 장기간 이뤄지기 때문에 모든 신체부위에 질병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타이어 성형공·압출공 등 관련 업무 종사자는 8개 중 어깨 회전근개파열, 팔꿈치 내(외)상과염, 손·손목 삼각섬유 연골복합체파열 3개 상병만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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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롱 환자라니, 당사자와 남은 가족에게 모욕”

복잡한 절차와 장기간 심사로 산재노동자들은 치료에 전념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장애인활동지원사 A씨는 2021년 업무 중 성추행을 당한 뒤 적응장애 진단을 받고 산재를 신청했다. 이후 요양급여내역 및 건강검진이력 10년치 등 공단에서 요구한 각종 서류들을 준비·제출하는 등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신청 이후 7개월이 지나서야 승인을 받았다. A씨 산재 신청을 도운 고미숙 전국활동지원사노조 조직국장은 “피해자는 보이지 않는 상처를 증명하기 위해 고통의 순간을 반복 진술해야 했다”며 “그는 사업주와 공단(지사) 사이에 카르텔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산재당사자와 가족들은 ‘나이롱 환자’ 같은 표현과 산재를 바라보는 인식이 모욕적이라고 꼬집었다. 업무 중 사고로 화물기사였던 아버지를 잃은 심성훈씨는 “아버지가 남긴 도움(산재 유족보상)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됐지만 남은 가족이 공부하고 생활을 유지하기엔 어려움이 있다”며 “대통령실 발언은 가족을 잃고 생계를 이어 가는 유족에게 큰 모욕”이라고 말했다. 심씨는 이어 “더 이상 유족에게, 산재로 치료받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며 “무엇보다 더 이상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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