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근로기준법이 제정 70년 만에 다시 변화의 갈림길에 놓였다. 동족상잔 비극 와중에 탄생해 껍데기로만 있던 근로기준법은 짧은 영광의 시대, 거대한 후퇴의 시대를 거쳤다. 지금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일주일에 최대 69시간 노동을 가능케 하는 윤석열 정부의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 앞에서 다시 방향을 찾아야 할 때다.

한국전쟁 중 집단적 노사관계법보다 늦게 탄생
70년 간 변화 없는 ‘근로자 정의’, 보호 취지는 퇴색

1953년 5월10일 제정된 근로기준법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시 만든 헌법을 기초로 했다. 1공화국 헌법은 근로의 권리와 의무, 근로조건의 법정 기준, 여성과 미성년자(소년)의 노동조건 보호 규정을 담고 있었다.

헌법 정신에 따라 정부를 운영하기 위한 목적에서 근로기준법이 잉태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본 근로기준법을 사실상 베껴 온 근로기준법은 한국전쟁 중 급히 만들어졌다. 선거를 준비하던 이승만 정권의 선거전략 중 하나였다는 것이 후대 평가다. 실제 노동기본권을 담은 근로기준법을 먼저 만들던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는 노동쟁의조정법·노동조합법·노동위원회법 등 집단적 노사관계법을 같은해 3월 먼저 제정했다. 노동자를 통제할 수단을 더 필요로 했다고 볼 수 있다.

근로기준법은 제정 70년 동안 큰 틀에서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를테면 제정 근로기준법은 “근로자라 함은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1997년 다시 제정된 지금의 근로기준법에도 “근로자란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말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현 근로기준법이 말하는 근로자는 옛 근로자와 다르다. 학습지 교사는 예전과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특수고용직 신분이 돼 어느 순간부터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한다. 계약·고용형태를 이유로 보호에서 배제되는 노동자는 이제 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 등으로 광범위하게 확산했다. 권두섭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는 “법은 그대로인데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법 취지는 퇴색해 지금에 이르렀다”며 “일하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모성보호·산업안전·직장내 괴롭힘으로부터 보호받는 등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근로기준법 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태어난 근로기준법은 노동시간 규제, 여성과 소년에 대한 특별보호, 재해 보상에 대한 규정, 노사대등의 결정 원칙 등을 담고 있어 그 내용으로만 보면 획기적이었다.

한국전쟁 후 전태일의 시대 :
근로기준법? 있지만 없습니다

하루 8시간 노동이 상식적인 단어가 된 데에는 경제학자이자 혁명가였던 마르크스에게 상당한 지분이 있다. 1866년 8시간 노동을 법률에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 자본주의 사회로 급변하던 세계 곳곳의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을 외치며 단결했다. 세계 노동절의 기원인 1884년 5월1일, 미국 시카고 방직노동자들이 외쳤던 요구가 하루 8시간 노동제였다. 1919년 국제노동기구(ILO)에서 노사정이 하루 8시간·1주 48시간의 내용을 담은 1호 협약에 합의하면서 보편적인 노동형태로 자리 잡았다.

1953년 제정 근로기준법에 명시한 노동시간은 ILO 1호 협약의 내용과 유사하다. 1주 48시간을 기준으로 하되 당사자 합의에 따라 60시간을 한도로 정했다. 최저임금제 근거를 담았고, 상시 10명 이상 사업장은 취업규칙을 작성해 정부에 신고하도록 했다. 근로감독관도 두라고 명시했다.

하지만 노동자 보호를 목적으로 탄생한 법률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았다. 정부는 집행 의지가 없었고, 정부를 압박할 외부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근로기준법 탄생에 앞장섰던 대한노총은 이승만 정권과 밀월관계가 깊어지면서 노동관계법 준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정부는 1963년에 이르러서야 계몽 위주에서 시정 위주로 감독을 전환했지만 전체 감독관은 50명도 되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이 아예 무용지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법을 근거로 목소리를 내는 노동자들이 송곳처럼 여기저기서 뚫고 올라왔다. 1956년 대구 대한방직 노동자들은 집단해고에 반발하며 정부를 상대로 싸우고, 1959년 섬유노조(현 섬유유통노련)는 하루 8시간 노동제 적용을 단체행동으로 관철했다. 노동조건을 규율하는 단일법이었던 근로기준법은 이후 분화했다. 선원법(1962년)·산업재해보상보험법(1963년)·산업안전보건법(1981년)·최저임금법(1986년)·남녀고용평등법(1987년) 제정 등으로 쪼개졌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들어선 군사정권은 노동자의 집단행동을 제약하는 노동관계법 개정과 함께 퇴직금제도 신설, 여성 산후유급보호휴가 확보 등을 개정 근로기준법에 담았다. 이즈음인 1965년 18세 소년 전태일은 평화시장 피복공장에서 노동자로 일을 시작했다. 여동생 나이대의 여공들은 허리조차 제대로 펴지 못한 채 하루 14~16시간 일했다. 장시간 노동을 막아줄, 정당한 임금을 받게 해 줄, 안전한 환경에서 일하게 해 줄 근로기준법은 이들에게 없었다. 해방직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총파업에 참여한 아버지의 경험을 전해 들은 전태일은 노동자를 위한 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있어도 지켜지지 않던 법을 들고 1970년 11월 자신을 불태운 전태일의 죽음 이후에도 근로기준법은 노동자의 곁으로 온전히 다가오지 못했다. 되레 1980년 4주 단위 탄력근로시간제(변형근로시간제)가 도입되면서 노동자의 노동시간 주권을 더욱 앗아갔다.

근로기준법 영광의 시대 :
87년 민주화 항쟁으로 노동기본권 진일보

노동법 전문가와 노동계는 1987년부터 1996년까지를 “근로기준법 영광의 시대”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87년 민주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이뤄진 개헌은 근로기준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단체행동을 막는 데 활용됐던 노동관계법은 민주화 항쟁을 지나며 무용지물로 전락했다. 노동자는 악법을 어겨서 깨뜨리고, 불법을 무릅쓰고 투쟁하는 경험을 축적했다.

1987년 11월 개정에서 탄력근로제 조항 삭제를 시작으로 노동자의 요구가 근로기준법에 잇따라 들어갔다. 1989년 3월 개정으로 적용 범위는 5명 이상 사업장으로 늘었다. 해고를 엄격히 하는 한편 정당한 이유 없는 해고와 불이익 처우를 받은 노동자는 노동위원회에 권리구제 신청을 할 수 있게 했다. 주 48시간이던 노동시간 한도는 44시간으로 단축하고, 유해·위험 작업의 근로시간 한도는 34시간으로 정했다. 당사자 합의로 주 56시간까지, 휴일근무를 포함하면 최장 64시간까지 연장할 수 있었다. 여성노동자 생리휴가 보장, 연차유급휴가일수 상향 등의 처우개선도 포함했다. 여성과 18세 미만 청소년의 야간·휴일근무를 금지하고, 당사자 동의와 노동부 장관 인가가 있어야만 가능하도록 했다. 임금체불 벌금액은 종전 500만원 이하에서 2천만원 이하로 올렸다.

노동시간 단축 효과는 눈에 띄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주당 실근로시간(비농전산업 평균)은 1986년 52.4시간에서 1997년 46.9시간, 1998년에는 45.8시간으로 감소했다. 1991년 ILO에 가입하면서 가장 보편적 노동기본권 내용을 담은 국제규범인 ILO 기본협약을 비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문민정부를 내세우며 군부정권과 차별화한 모습을 보이고자 했던 김영삼 정권은 6월 항쟁 기세에 밀렸던 앞 정부에서 하지 못한 ‘노동개악’을 준비했다. 세계화,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단어로 포장하며 노동자의 양보를 요구한 정권은 1996년 ‘노동법 날치기’라는 무리수를 뒀다. 노조를 약화하는 내용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과 함께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 신설, 탄력적 근로시간제·선택적 근로시간제·인정근로시간제·재량근로시간제를 포함하는 유연근로제 도입, 단시간 근로자 보호규정 신설, 퇴직금 중간 정산제 등을 포함한 근로기준법 개정을 밀어붙였다. 1997년으로 이어지는 양대 노총의 노동법 개악 저지투쟁(노개투)으로 노동법 개정은 백지화됐다. 권오성 성신여대 교수(법학)는 “감독관이 사용자 편을 들고, 정부는 노동을 통제 대상으로 여기면서 제정 이후 1987년 이전까지 근로기준법은 사실상 전혀 집행되지 않았다”며 “1989년 이후 부당해고구제 등 실제 생활규범으로써 작동하는 짧은 영광의 시기를 누렸지만 1997년 개정으로 모든 것을 앗아갔다”고 설명했다.

‘97년 외환위기’ 노동기본권 확대 역사 뒤로 돌려

역사 발전과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반동이 시작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등을 밀었다. 같은해 3월13일 여야 합의로 제정 형태로 재탄생한 근로기준법은 근로시간제도 유연화를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다. 당시 정부와 일부 전문가는 산업구조 변화와 고용형태 다양화에 탄력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근로기준법 개정 사유로 들었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을 밀어붙이며 토해 내는 주장과 토씨까지 같다. 97년 제정 근로기준법은 옛 법의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 조항을 ‘경영상의 이유에 의한 고용조정’으로 표현만 조금 바꾸고 시행을 2년간 유예하는 수준에서 탄생했다. 정리해고와 탄력적 근로시간제·선택적 근로시간제라는 두 가지 변형근로제 도입 등 노동시간 유연화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노동부(현 고용노동부)가 2000년 5월 내놓은 ‘우리나라의 근로시간, 궁금합니다’ 자료에 따르면 1997년 46.7시간이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다시 제정된 근로기준법 시행 후인 1999년 47.9시간으로 늘어났다.

1998년 1월 발족한 노사정위원회의 첫 작품인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은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를 근로기준법에 집어넣는 것으로 이어졌다. 같은해 2월 사업 양도·인수·합병을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 요건에 추가하는 개정이 이뤄졌다. 경영상 해고를 2년 유예한 조항도 삭제해 곧바로 시행했다.

노사정위는 1998년 사회협약을 내놓으면서 근로시간위원회를 같은해 상반기에 구성하기로 했다. 2000년 4월 근로시간단축특별위원회를 설치해 같은해 10월 연간 노동시간을 2천시간 이내로 줄이자는 데 합의했다. 주당 노동시간으로 환산하면 38.6시간이다. 2002년 금융노조가 산별중앙교섭을 통해 주 5일제, 주 40시간제를 쟁취하고서야 근로기준법 개정 논의에 속도가 붙었다. 이듬해 9월 기존 주당 44시간제를 40시간으로 줄이는 개정이 이뤄졌다. 당시 경제 5단체가 “삶의 질 높이려다 삶의 터전 잃습니다”라는 광고를 게재하며 저항했던 역사는 지금도 회자된다.

그렇다면 2003년 근로기준법은 좋은 법이었을까. 참여정부는 주 40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줄였다고 생색냈지만, ‘1주’는 토·일요일을 제외한다는 희귀한 행정해석이 버젓이 살아 있었다. 평일 12시간 연장근로와 휴일 16시간 근로를 포함해 주 최대 68시간 노동을 가능하게 했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을 기존 1개월 이내에서 3개월 이내로 연장하고, 유급생리휴가 무급화, 월차유급휴가 폐지 등 노동조건을 악화하는 내용이 추가됐다. 2007년 1월에는 부당해고에 대한 형사처벌을 삭제하고 노동위원회 구제명령에 대한 이행강제금 제도를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신설하면서 부당해고 처벌 수위를 낮췄다.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의 사전통보 기간을 60일에서 50일로 단축해 사용자 편의를 높였다. 다만 3년 이내 동일업무에 신규 채용을 할 때는 해고된 노동자를 우선고용하는 내용을 넣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기간에는 근로기준법에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러다 2018년 문재인 정부가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 도입을 추진하면서 다시 한번 큰 변화를 맞는다. 탄력적 근로제 단위기간을 확대하고, 고용노동부 장관이 인가하는 특별연장근로를 광범위하게 허용하면서 빛이 바래기도 했다. 2019년 1월 직장내 괴롭힘 금지를 담은 개정도 근로기준법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다시 ‘기로’에 선 근로기준법
5명 미만 사업장·비전형 노동자 ‘사각지대’
윤석열 정부는 노동시간 유연화 추진

근로기준법은 주 69시간제(주 6일 근무 기준)를 가능케 하는 윤석열 정부의 근로시간 제도 개편 추진으로 다시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정부의 개편안에 동의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1997년과 매우 흡사하다. 시대에 맞지 않고, 유연화해야 한다는 취지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포괄되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들이 아주 많다는 시각에 근거한 주장이다.

권두섭 변호사는 “낡은 법이라는 윤석열 정부의 주장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의 개념을 협소하게 판단하는 방식을 통해 법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를 줄여 나가려는 시도의 연장선에 있다”며 “근로기준법을 무력화하자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제조업 같은 전형적인 노동자상을 벗어난 노동자가 많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다만 새로운 방향이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삶의 질을 올리는 방향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박은정 인제대 교수(법학)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개념은 변함이 없는데 노동자성 해석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며 “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법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특수고용직이나 플랫폼 같은)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 개정을 고민해야 한다”며 “그러다 보면 유연화 얘기가 나올 수 있지만 그 방향은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어야지 장시간 근로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돼서는 안 된다”고 주문했다.

노동계는 최근 근로기준법 적용을 회피하려 변칙적인 계약 방식을 찾는 사용자 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입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황선자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부원장은 “사용자들은 근로기준법 적용에서 빠져나가 사용자로서 책임지지 않는 방안을 모색하고, 그 뒤를 쫓아 보완 방안을 찾아가는 식의 대응에는 한계가 있다”며 “가칭 일하는 사람을 위한 기본법 제정을 통해 사회 보호 대상자의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권오성 교수도 “플랫폼이라고 하는 시·공간이 확장된 곳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기란 사실상 어렵다”며 “공장 밖의 사람을 포괄하는 보편적 체계로서 기본법을 고민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34년간 유지해 온 5명 미만 사업장에 대한 주요 법조항 적용제외 문제 해결도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다.

1953년 제정 당시 15명 초과 사업장을 적용대상으로 했던 근로기준법은 1989년 개정으로 5명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했다. 1997년 제정에서도 5명 이상 사업장 적용과 4명 이하 사업장에 일부 조항을 적용할 수 있다는 내용은 그대로 옮겨왔다. 사업장 규모에 따라 적용대상을 정하면서 5명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대부분의 법보호에서 배제되고 있다. 부당해고 구제신청·연장근로한도제한·연장근로가산수당·연차유급휴가 등을 보장받지 못한다. 노동계는 5명 미만 사업장 전면 적용을 십수년간 요구하고 있다.

박용철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은 “노동자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근로기준법은 지금에 와서 5명 미만 사업장과 특수고용직·프리랜서 노동자, 도급용역 노동자 등을 포괄하지 못하면서 본연의 기능을 발휘하지 않고 있다”며 “모든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제도 개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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