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법은 헌법에 의한 근로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보장해 근로조건의 유지·개선과 근로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고, 노동관계를 공정하게 조정해 노동쟁의를 예방·해결함으로써 산업평화의 유지와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현행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의 1조 내용이다. 헌법이 정한 ‘노동 3권’을 보장하는 취지가 뼈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노조법은 지난 70년간 노동할 권리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는 진단을 받고 있다. 노동자들이 단체를 결성하고, 교섭하고, 행동하는 데에 수많은 제약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개정돼 왔다는 것이다.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에 맞서 쟁의행위를 한 노동자들은 손해배상·가압류를 당한다. 노조법이 근로자와 사용자 개념을 좁혀 놔 폐단이 컸다. 특수고용 노동자나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등은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실질적인 지배력을 가진 ‘원청’과의 대화가 불가능해지면서 노동자들의 쟁의행위는 불법으로 내몰렸다. 70년이 흘러서야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노조법 2·3조 개정)가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수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노조법이 노동권을 무력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전쟁 시기 탄생, ‘노동권 제한’ 방점

집단적 노사관계법 제정은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에 맞물려 있다. 1953년 3월8일 한국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에 맞선 ‘조선방직쟁의’가 기폭제가 됐다. 최저생계비도 못 미치는 하역노동자의 임금인상 투쟁으로 기록된 ‘부산부두쟁의’와 석탄공사를 상대로 한 ‘광산연맹쟁의’도 노동관계입법을 앞당겼다.

제정법은 노동쟁의에 급박하게 대처하기 위해 일본법을 모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쟁의행위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기 위한 측면이 컸기 때문이다. 당시 노동조합법(2조)은 노조 정의를 “노동조합은 근로자가 주체가 돼 자주적으로 단결하며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기타 경제적·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조직체 또는 그 연합체를 말한다”고 했다. 이 정의는 현재 노조법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노동 3권을 규제하는 측면이 강했다. ‘노조의 결격요건과 노조설립시 신고절차’를 정해 행정청 개입을 전면화했다. 노조규약이 법령에 위반하거나 공익을 해할 경우 행정관청이 노동위원회 결의를 얻어 취소·변경을 명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 대표적이다. 현역 군인과 경찰관리·형무관리·소방관리는 노조 설립·가입 대상에서 제외됐다.

노동쟁의조정법도 ‘노동권 제한’에 방점이 찍혔다. 사업장의 정상적인 유지와 운영을 저해하는 쟁의행위를 금지했다. ‘보고 의무’도 포함됐다. 노동쟁의가 발생했을 때 당사자는 즉시 행정청과 노동위원회에 보고하도록 정했다. 쟁의행위는 행정청의 알선이나 노동위원회 조정이 실패한 경우에 할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쟁의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은 면제됐다. 사용자는 쟁의기간 중 쟁의에 관계없는 사람을 채용할 수 없도록 하고, 쟁의행위로 손해를 입었을 경우 노조나 조합원 개인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했다. 쟁의행위의 민사면책과 쟁의행위 기간 중의 대체근로와 구속 제한이 명시된 것이다. 현행법과 다른 지점이다.

유신정권 ‘쟁의행위 억제’ 정책 추진

박정희 군사쿠데타 집권 이후인 1963년에는 노동 3법이 대폭 개정됐다. 1953년 제정법은 한국전쟁 당시라 실질적 기반이 취약해 박정희 정권의 개정법이 ‘초기 노동법’으로 분류된다. 1963년 개정은 군부의 정치적 결정으로 학계 등의 논의 없이 이뤄진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개정내용에는 △노사협의회 설치 △복수노조 금지 △조합비 제한 △기업별 교섭 강제 삭제 △산별노조 산하 단체의 교섭권 △노조쟁의 사전 적법 판정 △노동쟁의에 대한 긴급조정권 △공익사업 범위 확대 △노조 정치활동 금지 등이 들어갔다.

노조설립시 ‘허가’를 받아야 하는 조항도 신설됐다. 전국적 규모를 가진 노조는 신고서에 규약을 첨부해 노동청장에게, 기업별노조는 지자체장에게 제출하도록 했다. 조합원이 200명 이하더라도 행정청의 승인을 받아 대의원회를 둘 수 있다는 규정도 신설됐다. 노조에 대한 국가의 개입 범위가 확대된 시기로 평가된다.

유신정권이 집권한 1970년대는 그나마 허용됐던 합법적인 범위 내의 노조활동이 직접 규제받기 시작한 시점이다. 급격한 산업화 추진으로 사회계층 간 소득격차가 확대됐고, 노동규제에 따른 노동운동이 핍박받은 시기로 요약된다. 이로 인해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과 1976년 ‘동일방직 노동자투쟁’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권력에 의한 노동운동 통제를 기조로 노사협조를 강제했다.

1970년 12월 국가비상사태 선언에 이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국가보위법)’ 제정이 대표적인 ‘노동악법’으로 꼽힌다. 국가보위법(9조)은 직접적으로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을 규제했다. 1972년 12월17일 유신헌법을 공포해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권을 제한하기도 했다. 헌법 개정에 따라 1973년 3월 집단적 노사관계법도 노동 3권 보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됐다.

당시 개정 노동조합법은 “노사협의회의 기능을 단체협약 또는 취업규직에 규정된 범위 안에서 생산증강과 불만처리 등에 대한 협의·협조로 한다”고 정했다. 쟁의사항을 총회 의결사항으로 해서 노조간부 단독으로 쟁의를 제기하는 것도 막았다. 교섭권한을 지니는 자를 열거한 조항에서 ‘전국적인 규모를 가진 노조’와 ‘산하노동단체’ 표현 또한 삭제됐다. 없어진 조항은 산별노조 체제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노조에 대한 행정개입권이 확대된 것이다. 노동쟁의법에도 “국민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업을 공익사업에 준해 단체행동권 행사를 제한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전두환 신군부 시절 “최악의 노동입법”

노동탄압은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한 1980년대에 본격화했다. 쟁의권 행사 제약에서 나아가 단결권과 단체교섭권까지 제약했다. 구체적으로 노동쟁의조정법에서 국가·지자체·국공영기업체 및 방위산업체의 쟁의행위를 금지했다. 또 쟁의행위는 사업장 이외의 다른 장소에서 할 수 없도록 했다. 개별 개정내용을 보면 △유니온숍 삭제 △노조의 기업별 체제로의 전환 △단체교섭 위임금지 △노조 설립과 운영에 관한 제3자 개입금지 △노조임원 자격 제한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노조 재무사항 공개의무 등이 들어갔다.

이후 1987년 제3자 개입금지에서 상부조직이 제외되고 직장폐쇄 대항성 요건이 포함되는 등 일부 개정됐지만, 노동악법의 본질은 그대로 남았다. 임종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저서 ‘노동법(20판)’에서 “이 시기 입법은 근로자의 단결활동을 심각하게 탄압하고 노동법의 국제기준을 무시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며 “이 같은 퇴행적·후진적 요소 때문에 최악의 노동입법이라는 비판이 증폭됐다”고 평가했다.

특히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은 “독소조항”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기업별 노조 체제가 굳어진 계기가 된 것이다. 한국노동법학회는 2012년 ‘노동법 60년사 연구’ 정책연구보고서에서 “정부당국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는 모든 노동운동가들은 ‘3자 개입금지’ 조항으로 탄압할 수 있는 ‘독소조항’”이라며 “국민 누구도 노동문제에 대해 애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악법”이라고 진단했다. 노동쟁의조정법도 행정관청 결정으로 공익사업이 아닌 일반 사업장에도 중재를 개시할 수 있도록 개정돼 ‘파업의 예방강화’에 집중됐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노조활동 ‘숨구멍’
96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총파업

민주항쟁이 촉발한 1987년에는 노사관계 입법이 ‘대변혁’을 맞는다. 6·10 민주항쟁과 7~9월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이 법 개정에 불을 당겼다. 이에 따라 개정 노동조합법에서 조직형태 강제규정이 삭제됐다. 노동조합 임원의 자격제한 규정과 행정관청의 노조 해산 및 임원개선명령권 삭제도 이뤄졌다. 개정 노동쟁의조정법에는 △공익사업 범위 축소 △임의조정제도 규정 신설 △쟁의행위 금지 대상 범위 축소 등의 내용이 담겼다.

노조의 자주적 운영 확보와 쟁의 제한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개선된 셈이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신규노조 설립이 급격히 늘고 조직의 형태가 다양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7년 노태우 대통령의 ‘6·29 민주화 선언’ 이후 노동운동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노사분규가 1986년 276건에서 1987년 3천749건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이는 국회의 노동법 개정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민주화를 표방한 6공화국이 1988년 출범하면서 13대 국회가 그해 12월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근로기준법 개정안을 통과했다. 하지만 노동관계법은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다시 국회에 환송됐고 통과되지 못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0년대는 경제위기를 맞으며 노동환경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1999년 민주노총이 합법화하면서 상급단체 복수노조 시대가 열렸지만, 변경근로시간제·정리해고제·파견근로제 등 관철을 위한 노동법 개정이 지속해서 추진됐다. 공무원의 단결권 제한과 복수노조 금지·정치활동 금지 등은 국제노동기구(ILO)의 단결권에 반한다는 지적이 터져 나왔다. 1996년 5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한국경총 등이 참여한 ‘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발족했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정부는 정부안을 마련해 국회에 개정안을 제출했다.

결국 1996년 12월26일 여당인 신한국당이 단독으로 노동관계법을 처리했다. 개정안 쟁점이었던 ‘3금(제3자 개입금지·복수노조 금지·정치활동 금지)’ 조항을 삭제하고, ‘3제(파견근로제·정리해고제·변형시간근로제)’ 중 정리해고제와 변형시간근로제는 확정됐다. 복수노조 허용 유예(상급단체 2000년·단위사업장 2002년)와 정리해고제 신설은 노동계의 큰 반발을 샀다. ‘날치기’ 통과에 양대 노총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했다. 한국 최초의 총연맹 단위 총파업으로 기록됐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97년 노조법 통합, 단결권 보장은 ‘미흡’

‘노동법 파동’은 새로운 노동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1997년 3월 종전의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이 ‘노조법’으로 통합됐다. ‘노사자율·자치주의’ 원칙 아래 정부의 개입이 종결됐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하는 평가도 있었지만, 결사의 자유 보장 측면에서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도 함께 나왔다. 여전히 공무원과 방위산업체의 단결권과 쟁의행위는 인정되지 않은 것이다. 행의행위 중 대체근로 허용과 연차유급휴가 상한제 도입도 비판 대상이 됐다.

노사관계는 이후에도 후퇴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대량실업이 발생해 노동환경이 악화일로로 치달은 점이 결정적 계기였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1월 노사정위원회를 발족한 뒤 10대 의제를 타결해 개정안은 그해 2월20일 공포됐다. 노동부 장관이 담당한 노동 관련 업무 중 일부를 시도지사에 이관했고, 단체협약 해지 통보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연장했다. 1999년에는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교원노조법)이 제정되고, 공무원직장협의회 설립이 허가됐다. 하지만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전임자 급여 지급금지 등 중요 규정의 시행은 5년간 유예돼 비판의 대상이 됐다.

복수노조 전면 허용, 교섭창구 단일화 ‘반발’

참여정부 시절인 노무현 정부에서는 노동권의 일부 진전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5년 1월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공무원노조법)이 제정돼 공무원 노조가 합법화됐다. 필수공익사업에서의 파업을 전면 제한하던 ‘직권중재제도’도 폐지됐다. 아울러 제3자 지원신고제도 폐지하고, 필수공익사업의 대체근로를 허용했다.

2006년 말에는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이 완전히 삭제됐다. 다만 노사정이 합의한 노조전임자 급여지원 금지규정과 기업단위 복수노조 시행을 3년간 유예한 부분은 도마에 올랐다. 특히 2007년 1월 시행된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은 비정규직 확대에 기여했다는 지적이 일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1월에는 복수노조를 전면 허용하고 전임자 급여를 금지하는 내용의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유급 근로시간면제제도(타임오프)와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도 도입됐다. 하지만 당시 추미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이 한나라당과 ‘날치기’로 사인한 다음 직권으로 법을 상정해 비난받았다. 노동계 등은 복수노조 허용과 교섭창구 단일화를 하나로 묶어 법을 통과시킨 것에 반발했다. 교섭창구 단일화로 인해 소수노조 소속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에 제약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후 일부 개정이 이뤄지다가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 12월 ILO 기본협약 비준과 관련한 노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개정안에는 △해고자·실업자의 노조가입 허용, 기업별 노조의 대의원·임원의 자격 제한 △전임자 관련 규정 삭제 △개별교섭시 노조 간 차별 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등이 포함됐다. 2021년 4월 ILO 협약이 비준되고, 이듬해 4월 발효됐다.

‘노란봉투법’ 노조법 역사 변곡점 될까
전문가들 “자율이 노조법 개정 당면과제”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에 참여한 노동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5월22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노조법 2·3조 즉각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에 참여한 노동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5월22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노조법 2·3조 즉각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노조법 개정안은 또다시 변곡점을 맞고 있다. 노조법 2조의 ‘사용자 범위’를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원청으로 확대하고, 노조법 3조의 ‘손해배상 청구 제한’을 손해배상 의무자별로 귀책사유와 기여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책임 범위를 정하도록 하는 개정안이 본회의에 직회부된 상태다. 30일 예정된 본회의에 상정돼 표결을 거칠지 관심이 쏠린다.

노동법 전문가들은 노동관계법은 노동 3권을 무력화하고 노동유연화에 초점을 맞춰 변천해 왔다고 지적한다. 권영국 변호사(법무법인 두율)는 “노조법은 노동 3권 행사를 제한하고 처벌하는 제한법”이라며 “단결권은 여전히 전통적인 고용관계에서 협소하게 보고 있어 다양한 노무제공자들의 노동 3권을 부정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단체교섭권 역시 교섭창구 단일화를 강제하고 있어 기업별노조와 기업별 교섭을 사실상 강요하고, 소수노조의 교섭권을 박탈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단체행동권에 대해서도 “근로조건과 관련한 이익분쟁에 대해서만 파업할 수 있도록 해서 광범위한 손배·가압류와 형사처벌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사실상 치안유지법과 같은 수준”이라고 꼬집었다.

김기덕 변호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는 “노동관계법이 노조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가장 문제”라며 “쟁의행위를 하는 모든 부분은 개정될 때마다 규제가 강화돼 왔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드는 자체가 왜 신고하고 허가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교섭창구 단일화 때문에 대부분 사업장에서 하나의 노조만 교섭할 수 있는 현실도 단체교섭권을 무력화하는 요소로 지적했다. 최종연 변호사(법률사무소 일과사람)도 “노조 설립·운영 등 다방면에서 행정청에 대한 신고와 감독이 개입되는 것이 가장 문제점”이라고 짚었다.

학계 의견도 비슷하다. 박은정 인제대 교수(법학)는 “집단적 노사관계의 핵심 키워드는 ‘자치’이므로, 노사관계 질서를 법으로 보호하거나 형성하려는 시도는 불필요하다”며 “그런데도 우리나라 노조법은 ‘노사관계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지나치게 규제하거나 통제한다. 이를 통해 ‘산업평화의 유지’ 같은 결론을 얻어내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권오성 성신여대 교수(법학) 역시 “집단적 자치보다 (정부) 후견 프레임이 강한 것이 문제”라며 “노조 설립신고와 교섭창구 단일화 등 모든 단계에서 행정의 개입을 요구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노사관계는 ‘규제’보다는 ‘자치’에 맡기고, 노동자와 사용자 개념을 넓혀야 한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권영국 변호사는 “타인에게 노무를 제공해 생활하는 노무제공자들을 모두 근로자 개념에 포함시키고, 고용계약에 관계없이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결정하는 자를 사용자로 정해 자유롭게 교섭하고 단체행동을 할 수 있도록 노조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은 민형사상 면책되도록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권두섭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도 “초기업 단위 협약에 대한 효력확장제도 등 산별교섭을 촉진하기 위한 여러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며 “산별교섭을 법제화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박은정 교수는 “ILO 협약 이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당면과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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