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지난 3년간 굉장히 힘들었다. 도로공사가 불법파견 판결을 이행했다면 이런 사태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 고통은 노동자가 받고 형사재판에 넘겨져 위축됐다. 계속 집으로 문서가 송달되는 상황을 겪다 보니 공사가 노동자를 괴롭히는 복수 수단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천문학적인 손해배상액을 청구받은 박순향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부지부장이 손해배상 소송 1심 선고 이후 탄식하며 한 말이다. 박 지부장은 본사 점거농성으로 공동주거침입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벌금 800만원을 선고받았는데 이와 별도로 한국도로공사가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도 휘말렸다. 그는 “더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이 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회전문·잔디·화단 파손’ 1억3천만원 청구

한국도로공사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농성한 톨게이트 요금수납원에게 1억여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가 패소했다. 도로공사는 수납원들이 본사 건물에 진입하며 현관과 집기가 파손됐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공사가 이를 입증하지 못했다고 선을 그었다. 노조법 2·3조 개정 요구가 잇따르고 있어 이번 판결의 의미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구지법 김천지원 민사1단독(하석찬 판사)은 전날 한국도로공사가 톨게이트 수납원인 톨게이트지부 노조간부 등 12명을 상대로 낸 손배해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소송이 제기된 지 3년 만의 1심 결론이다.

공사가 2019년 8월 대법원의 직접고용 판결을 이행하지 않으면서 노사갈등이 촉발됐다. 대법원은 당시 수납원들과 공사가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상 근로자파견관계에 있다고 판결했다. 이에 공사가 그해 9월 일부 수납원만 직접고용의사를 밝히자 노조는 국토교통부 앞에서 이강래 당시 사장 면담을 요구했다. 하지만 면담이 거부됐고, 수납원들은 9월9일부터 2020년 1월31일까지 본사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노조간부 11명은 지난 15일 공동주거침입 등 혐의와 관련해 2심에서 징역형의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형사소송과 별개로 공사는 수납원들이 건물에 진입하며 현관을 파손하고 화분과 집기를 깨뜨리는 등 손해를 입었다며 노조간부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액 1억3천여만원을 청구했다. 회전문 보수(5천400여만원), 잔디·화단 복구(3천800여만원), 보도블럭 침하 보수(2천800여만원) 등 14건의 피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노조측은 “노조간부들이 점거를 기획한 적이 없고, 파손된 시설물 중 상당수는 점거행위와 관련이 없다”고 반박했다. 특히 경찰이나 원청 노조 조합원들의 행위로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시설물 파손에 대한 청구도 포함됐다고 지적했다.

법원 “노조간부 파손 기획·지시 증거 없다”

법원은 공사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공사가 시설물 파손과 관련한 노조간부들의 공동행위를 입증하지 못했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 사건 청구는 점거행위 그 자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가 아니라 시설물의 파손으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라며 “노조간부들에게 공동불법행위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노조간부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객관적 공동성이 있는 행위를 했는지가 공사에 의해 입증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노조간부들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노조 조합원들에게 파손행위를 기획·지시·지도했는지에 관해 공사가 아무런 입증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공사가 ‘점거’에 관한 노조의 기획·지시만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설물 파손이라면 공동재물손괴 등으로 형사처벌이 가능한데, 대부분 간부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경찰 파손 정황도 … 노동계 “노란봉투법 입법 시급”

공동재물손괴 혐의로 기소된 박순향 부지부장이 깨뜨렸다는 출입문도 공사가 제시한 피해현황에는 없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시설물 파손이 과연 점거행위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인지, 실제로 누구에 의해 발생한 것인지, 파손의 실제 행위자가 피고 노조 조합원들인지를 알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재판부는 농성 조합원들이 파손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점거행위 기간 중 촬영된 사진 중에는 경찰 버스가 원고 본사 사옥 주변 보도블럭 위에 주차된 장면이 촬영된 사진 및 한국노총 소속 조합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원고 본사 사옥 주변 잔디에 앉아 있는 장면이 촬영된 사진도 있으므로 파손의 결과가 반드시 노조 조합원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동계는 판결을 환영하면서도 노조법 개정을 촉구했다. 시민단체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는 이날 논평을 내고 “승소는 반갑지만 3년 동안 억울하게 ‘피고’로 서야 했던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며 “승소했어도 재판이 주는 고통은 보상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노란봉투법의 입법이 시급한 이유”라고 밝혔다.

이어 “쟁의행위는 공사의 ‘파견법 위반’ 때문에 일어난 것인데 회사는 불법을 저지르고도 피해자와 대화를 거부하고 판결도 이행하지 않는다”며 “노란봉투법이 있는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불법을 저지르고 자정하지 않는 기업’들의 몫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조간부들을 대리한 하태승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는 “노조 쟁의행위에 관한 손해배상과 관련해 기존 법리를 엄격히 적용하면서도 노조와 조합원들의 책임 범위를 엄격히 판단한 점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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