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지금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공정’을 가장 많이 말합니다. 공정이란 일하면 대가를 착취당하지 않게, 애초부터 막혀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공정의 핵심은 기회균등입니다. 기회균등은 말처럼 쉽지 않아요. 취약계층도 동등하게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질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최소한 주거와 의료·교육이 해결돼야 하죠. 돈이 많이 듭니다.”

코로나19 위기는 한국 사회 민낯을 처절하게 드러냈다. 취약계층에게 일자리와 소득을 앗아갔지만 사회안전망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반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처럼 상위계층은 불공정으로 어마어마한 불로소득을 쓸어 담는다. 전쟁과 재난 시기, 국가와 재정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망가진 국민 삶과 사회 시스템을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정상화해야 할까.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6일 오전 서울 성북구 고려대 정경관에서 김태일(57·사진) 고려대 교수(행정학과)를 만났다. 정경대학 학장을 함께 맡고 있다. 학교에서 공공경제학과 복지정책을 가르치고 있고, 2001년부터 함께하는시민행동 공동대표, 2010년부터 좋은예산센터 소장을 맡아 시민운동가로서도 폭넓게 활동하고 있다.

재정 전문가인 그는 2013년 <국가는 내 돈을 어떻게 쓰는가>, 2014년 <재정은 어떻게 내 삶을 바꾸는가>에 이어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7월 <한국경제,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를 펴냈다. 국가와 재정의 역할을 짚어 보는 데 좋은 지침서가 되고 있다.

예상치 못한 위기에 대응할 재정확대 필요
소득주도 성장, 맞지만 급격한 추진이 논란 자초

-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정부는 4차에 걸친 추경과 재난지원금을 편성·지원했다. 이를 두고 한쪽에서는 국가부채 증가를 우려하고, 다른 쪽에서는 선진국에 비해 재정지출이 낮다고 비판한다. 국가 재정과 역할로 볼 때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나.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코로나 위기로 인한 것, 이와 상관없이 문재인 정부 재정기조로 봐야 한다. 코로나 위기 때 돈을 확 푸는 것은 필요하다.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경제적 충격이 적었지만 저는 더 풀어도 된다고 봤다. 전쟁이 났는데 국가채무 때문에 군자금을 안 쓸 건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위기에서는 대응할 만한 충분히 돈을 써야 한다. 문제는, 그와 상관없는 국가채무다. 평소 국가 재정건전성을 말하는 것은 위기가 왔을 때 잘 쓸 수 있기 위해서다. 문재인 정부가 2019년 내놓은 ‘2019~2023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은 굉장히 실망스럽다. 매년 국가채무를 늘리겠다는 내용이다. 대부분 정부는 초기 재정적자를 보다가도 임기 말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지금 왕창 쓰면 다음 정부는 어떻게 하란 건가. 그 전에는 모든 지자체에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하겠다고 해서 역시 비판받았다.”

- 문재인 정부는 초기 소득주도 성장을 대표적인 경제정책 브랜드로 내세웠다. 그러나 최저임금은 4년 평균 박근혜 정부 인상률과 엇비슷하고, 노동소득 양극화는 더 심화했다는 평가다. 소득주도 성장 정책은 실패했다고 보는가.

“이것은 주류학자가 아닌 소수학자에게 인정받는 임금주도 성장에서 나왔다. 자본과 노동 균형에서 노동배분(임금)을 높이자는 건데, 우리나라는 자영업자 문제가 심각하니 ‘소득’으로 했고, 복지로 개념이 확대됐다. 다 맞지만, 하필 네이밍이 논란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노동소득을 중시하는 성장이라고, 성장하되 보통 사람들 가처분소득을 높이겠다고, 불평등을 완화하면서 성장하겠다고, 성장의 과실을 골고루 퍼지게 하겠다고 했으면 어땠을까. 차라리 포용적 성장이 낫다. 이론이 아니라 많이 쓰는 표현이다. 소득주도 성장에서 했던 정책은 다 필요하다. 다만,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린 것은 아니라고 본다. 박근혜 정부 때도 꾸준히 올렸다. 매년 그 기조대로 꾸준히 했다면 논란은 없었을 거다. 정책을 급격히 추진하면 혼란을 부른다.”

공정성 뇌관 건든 LH 사태 철저한 대책 요구
새로운 독과점 플랫폼 기업 규제에 집중해야

- 최근 LH 사태로 부동산 불로소득 뇌관이 터지면서 우리 사회에서 ‘불공정 해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폭발하고 있다. 공정경제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탓인가.

“LH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란 걸 알 것이고, 어느 정부에서든 터질 수 있었던 것이다.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 (LH 사장 시절) 해결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미국에서도 1920년대 뉴딜을 할 때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한 활동을 특별감사기구에서 철저히 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부동산과 교육은 공정성을 건드리는 뇌관이다. LH 문제는, 삼성 같은 재벌 문제가 아니라 작은 사람들까지 모두 부정부패에 연결돼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방의원을 비롯한 토호들이 부동산과 건설로 부당한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해결이 안 되고 여전히 만연하다. 정부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철저히 대책을 세워야 한다.”

- 우리 사회는 공정경제를 훼손하는 최저임금 미준수, 불법파견, 불공정 원하청 관계, 비정규직 차별이 여전하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정부 역할은 시장경제가 작동하도록 규칙이 잘 지켜지게 심판하는 역할을 하는 거다. 그게 공정경제를 위한 기본 역할이다. 그것이 잘 안 되면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다. 문제는 사회경제구조가 바뀌면서 독과점 문제도 과거 재벌 대기업과는 다른, 플랫폼·인터넷 기업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독과점 규제가 기존 산업사회에서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새롭게 등장한 노동형태에 대해 고민하고, 너무 중요하게 생각한다. 반면 우리는 (공정경제에서) 이쪽에 집중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삼성그룹 승계 문제도 중요하지만, 플랫폼 노동 문제에 집중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거에 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꾸준한 추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는 행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 정부 정책으로 어떤 문제를 한 번에 발본색원하거나 해결하는 것은 어렵다고 봅니다. 사회경제구조 변화에 따라 비정규직 문제도, 공정거래에서 굉장히 큰 문제로 직시하고 주의하면서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정부는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원칙을 지켜 나가면서, 그 방향으로 꾸준히 추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장에서는 정부보다 한발 앞서 변신하고 새로운 유형이 등장합니다. 정부는 발 빠르게 대응해야 합니다.”

복지지출에서 사회안전망 확충이 가장 시급
기본소득, 사회안전망 사각지대 메우는 대안

- 국가재정과 복지지출을 떼놓고 보긴 어렵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에서 사회지출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절반 수준에 머문다. 우리 복지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건강보험을 제외한 나머지 사회보험 사각지대가 크다는 점을 저서에서 지적했다.

“(낮은 것은 맞지만) 그래도 문재인 정부에서 복지지출이 많이 늘어난 편이다. OECD 국가 중 우리 복지지출 증가율이 빠른 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정말 필요한 것을 하고 있느냐다. 사회보험 사각지대가 크다는 것이 코로나 위기가 오면서 확연히 드러났다. 정규직 위주의 사회보험이 맞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이번에 드러났으니 전 국민 고용보험 도입 등 사회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 가장 시급한 것은 사회안전망이다.”

- 기본소득과 복지제도가 상충되는 개념으로 거론되곤 한다. 기본소득 논쟁이 한국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전통적 기본소득론자는,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라고 보기 때문에 복지제도와는 상관없이 지급해야 한다고 본다. 다른 한쪽은 전통적 사회안전망이 깨졌으니 기본소득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에 복지제도 비효율을 없애기 위해 기본소득을 주자는 우파 개념까지 혼재돼 있다. 실용적으로 볼 때 우리 사회 기본소득 논쟁은 산업시대에 사각지대가 많은 복지제도의 대안, 사회안전망으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경제사회구조가 변하면서 심화하는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적 수단으로서 기본소득 말이다. 현재 정부가 아동은 아동수당, 노인은 기초연금 등을 기본소득처럼 준다. 아직 근로연령대에는 없으니 소득안전망을 확고히 하면 좋을 것이다. 기본소득 논의가 일자리 없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만드는 컨센서스를 끌어내면 좋을 것이다.”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교육·돌봄서비스 민간에 맡기는 ‘비지떡 행정’
‘5대 거악’ 맞서는 국가의 역할, 시대 따라 달라져

- 사회서비스 일자리 중 산술적으로 140만개의 돌봄서비스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저서에서 제시했다. 경력단절 등 여성고용 문제도 같이 해결할 수 있다고 봤는데. 국가는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지금은 고용이 큰 문제다. 고용 자체가 부족하고, 열악한 일자리가 문제다. 국가는 민간에서 일자리가 잘 창출되도록 활력을 돋우고, 공정하게 돌아가도록 심판자 역할을 한다. 다만 돌봄 일자리는 처음 창출할 때 공공 위주로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민간 위주로 확 가 버렸다. 지금 국가 위주로 다시 하겠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공공이 필요한 영역이 있다. 민간이 하기 어려운, 낙도돌봄이나 긴급돌봄·중증돌봄 같은 것 말이다. 돌봄시장에서 30%는 공공에서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돌봄서비스 제공자들이 적절하게 대우받을 수 있도록 국가의 규제자로서 역할이다. 우리나라 행정이란 게 정부는 돈 대고 민간이 서비스를 제공한다. 교육·의료·돌봄도 민간이 하고 정부가 돈만 대 줘 문제가 생긴다.

흔히 우리나라 행정을 ‘비지떡 행정’이라고 한다. 싼값에 하려다 보니 질이 좋을 수 없다. 정당한 대가를 받도록 하면서 양질의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육·돌봄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정부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

1942년 2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서 나온 베버리지 보고서에는 정부는 무지·불결·질병·나태·궁핍이란 5대 거악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제시돼 있다. 5대 거악에 대항하는 정부 정책이 교육·공공주택·의료·고용·사회보장이다. 이것이 복지정책을 이루는 요소다.

- 우리나라에서도 역대 정부에서 복지기본선이 추진돼 왔고, 최근 주요 일부 대선주자들이 기본시리즈나 국민생활 기본선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사회 5대 거악에 맞선 복지정책 현주소는.

“5대 정책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다. 정부의 역할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 교육은 4차 산업혁명에 따른 교육이라든지 사회교육이 요구된다. 언제까지 옛날 교육을 할 수는 없다. 의료는 문재인 케어를 하되 전달체계를 같이 마련하면서 가야 할 것이다. 고용이 가장 큰 문제다. 쉽지 않으니 노력해야 한다. 사회안전망은 일정 소득을 보장하면서 가야 한다. 주택은 LH 사태가 있었지만 공공 주도 공급방향이 맞다.”

“규칙 위반으로 취약계층에게 피해 가중돼”
코로나19 이후 ‘새로운 사회계획’ 국민신뢰 핵심

- 결국 복지지출을 늘리고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이는 증세와 무관하지 않다. 조세저항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새로운 복지지출을 하려면 세원이 필요하다.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일본은 2019년 부가가치세를 8%에서 10%로 올렸다. 그때 늘어난 2%에 대해 사회보장과 일부 채무상환에 쓰겠다고 법에 명시했다. 우리는 다른 나라에 비해 올릴 여지가 있는 게 부가가치세와 소득세다.”

- 국민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국민이 신뢰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 예컨대, LH 사태는 정부가 전달체계에서 투명하게 부정부패를 찾겠다고, 감사원 등 상시감시기구를 둬서 확실히 찾겠다고 설득해야 한다. 그런 것을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다.”

- 코로나19 이후 정부 역할과 공공성 확대에 대한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저서에서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규칙 위반으로 일어나는 피해는 취약계층에게 집중된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이후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높다. 새로운 사회계약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야 하나. 이 과정에서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나.

“코로나19 이후 사회안전망 확충, 최저기본소득 보장, 일자리 창출에 관한 새로운 사회계약이다. 사회계약은 국가와 국민의 약속이다. 우리도 코로나19 종식 즈음, 내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 이런 약속을 해야 한다. 부정부패를 없애 투명하게 하고, 국민 삶을 위해 국가운용을 잘하겠다, 그래서 재원을 이렇게 마련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이 약속의 핵심이다.”

글=연윤정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