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업사태 해결을 촉구하며 서울 중구 서울중앙우체국 앞 전광판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강세웅(오른쪽)·장연의씨가 16일 의료진의 건강검진이 끝난 뒤 농성장에서 웃고 있다. 정기훈 기자

 

설 연휴를 이틀 앞둔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봄을 재촉하는 비가 옷을 흠뻑 적시는 가운데 온몸으로 비를 맞던 사람들이 하나둘 이순신 장군 동상 앞으로 모였다. 돗자리를 펴더니 상을 놓고 사과·배·감이며 조기와 고기, 떡과 전까지 올렸다. 무릎을 끓고 술잔에 술을 따라 휘휘 돌렸다.

“임금체불로 고향에 가지 못하는 건설노동자들이 상을 차리고 삼가 조상님께 고하나니, 이곳 광화문광장에서 이렇게 차례상을 올릴 수밖에 없는 자손들의 고통을 이해해 주시길 간절히 비나이다.”

이용대 건설노조 위원장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함께 자리한 15명의 건설노동자가 동시에 절을 올렸다.

한 건설노동자는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건설노동자들이 임금체불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농성을 해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곧이어 쏟아지는 빗소리에, 바삐 오가는 자동차 소리에 묻혀 버렸다.

◇“임금을 받아야 고향을 가지”=민족 최대 명절이라고 하지만 수많은 노동자들이 임금체불과 장기농성, 해고로 인해 고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해마다 반복되는 풍경이다. 선진국 반열에 올랐고, 그렇기 때문에 국격을 생각해야 한다는 2015년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건설노조가 최근 한 달간 조사해 이날 발표한 2015년 1월 건설기계(덤프트럭·굴삭기) 종사자 체불현황을 보면 지금 이 시각에도 98개 공사장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73억원의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29만3천명의 노동자가 임금 1조3천195억원을 받지 못했다. 2013년보다 인원은 9.8%, 금액은 10.6% 늘었다.

이용대 위원장은 “건설노동자들은 고향 방문 생각에 즐거워야 할 시간에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밀린 임금을 달라고 농성을 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날 합동차례에 참가한 목수노동자 임차진씨는 지난해 일감이 많아 올해 설에는 주머니가 두둑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그가 일을 맡았던 하도급업체가 도산해 버린 탓에 임금 400여만원을 떼였다. 임씨는 “올해 부모님 용돈과 조카 세뱃돈으로 100만원 정도를 쓸 계획이었다”며 “용돈은커녕 생활비도 없는 상황이라 고향 내려가는 것을 포기했다”고 아쉬워했다.

25톤 덤프트럭 운전사 정명인씨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최근 3개월치 임금을 받지 못했다. 역시 일을 했던 하도급업체가 부도나 버렸기 때문이다.

정씨는 “3개월달 동안 임금을 못 받은 정도가 아니라 기름값과 자동차 정비비까지 700만원을 손해 봤다”며 “임금을 달라고 원청업체에 사정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 설 앞두고 해고, 가족에게 비방 서신까지=노동자들을 울리는 것은 임금체불만이 아니다. 설을 앞두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통보받은 하이투자증권 노동자들은 언제 잘릴 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설 연휴를 맞고 있다.

회사측은 설 연휴가 끝나는 23일 권고사직과 희망퇴직 시행공고를 내겠다고 밝혔다. 설 연휴고 뭐고 하루하루가 불안하기 그지없다. 박정현 사무금융노조 하이투자증권지부장은 “노조 간부들과 설 연휴를 반납하고 하이투자증권 여의도 본점에서 철야농성을 벌이기로 했다”며 “연휴 기간에도 불안에 떠는 조합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투쟁을 독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통신대기업 간접고용 비정규 노동자의 처지는 서글프다. SK브로드밴드 인천계양센터 개통기사 장연의씨와 LG유플러스 전남서광주센터 수리기사 강세웅씨는 이날로 11일째 서울 중구 서울중앙우체국 앞 15미터 높이 광고탑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그 밑에서는 조합원들이 함께 지지농성을 진행 중이다.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협력업체들은 지난 15일 설 연휴를 앞두고 조합원들 집에 “노조가 과도한 요구를 제기해 수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협력업체들은 “(노조가 요구한) 각종 기금은 사용처가 불투명해 현재 노동부가 조사를 진행 중인 사항”이라며 마치 조합원들이 불법을 저지르는 것처럼 왜곡했다.

SK브로드밴드 인천계양센터는 고공농성 중인 장연의씨의 홀어머니를 찾아가 아들이 농성을 중단하게 설득해 달라고 종용하기까지 했다.

이 밖에 평택공장 굴뚝에서 고공농성 중인 쌍용차 노동자들과 공장 분리매각 저지와 복직을 위해 경북 구미공장 굴뚝에 오른 스타케미칼 해고자를 포함해 노동자들은 설 연휴에도 가족과 함께 있지 못하고 삶을 이어 나기기 위해,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다.

양대 노총은 "정부가 연례행사처럼 명절을 앞두고 체불임금 문제 해결을 강조하지만 올해 설을 앞두고도 고향을 가지 못하는 노동자의 고통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며 "다단계 하청 같은 사회 약자에게 아픔이 가중되는 만큼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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