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임금 시계가 거꾸로 돌 조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기간에 대니얼 애커슨 미국 지엠 본사 회장이 통상임금 문제 해결을 전제로 80억달러 투자계획을 밝히고, 박 대통령과 수행단이 여기에 긍정적 사인을 보내면서 통상임금 문제가 최대 노동현안으로 떠올랐다.

고용노동부는 방미단의 조원동 경제수석이 “노사정위원회가 있으니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는지 봐야 할 것”이라고 브리핑한 다음날인 지난 10일 노사 단체와 사전조율 없이 "통상임금 산정범위를 둘러싼 노사정 논의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정기적·일률적·고정적으로 지급되는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이라고 본 대법원의 판례가 기업에 상당한 비용부담을 주는 만큼 이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정부가 노동자들의 월급명세서에 손을 대겠다고 나선 셈이다.

◇통상임금 넓게 보는 법원=근로기준법 시행령 제6조는 통상임금을 “근로자에게 정기적이고 일률적으로 소정근로 또는 총근로에 대해 지급하기로 정한 시간급금액·일급금액·주급금액·월급금액 또는 도급금액”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통상임금은 해고예고수당과 유급휴일임금, 연장·야간·휴일 가산임금, 연차유급휴가수당, 출산전후휴가수당을 산정하는 기초가 되고, 퇴직금 산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어디까지를 통상임금으로 보느냐에 따라 월급봉투의 두께가 달라진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산입 여부는 법조계에서는 이미 한풀 꺾인 쟁점이다. 대법원은 90년대 중반부터 상여금을 ‘노동의 대가’인 임금으로 판단하고, 정기적·고정적·일률적으로 지급되는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판례를 유지해 왔다. 법원은 상여금에 대해 "사용자가 복지적·시혜적으로 주는 급여가 아니라, 노동의 대가"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3월 나온 대법원의 금아리무진 관련 판결도 기존 판결의 연장선에 있다. 금아리무진은 노동자의 재직기간에 따라 성과급을 4단계로 나눠 분기별로 지급했는데, 법원은 각각의 등급에 맞춰 해당 인원에게 지급된 상여금도 통상임금으로 봤다. 통상임금의 요건인 ‘일률성’의 범위를 넓게 인정한 것이다. 이처럼 법원의 판결은 통상임금의 범위를 점점 확대하는 추세다.

◇통상임금 좁게 보는 노동부=법원과 달리 노동부는 예규인 ‘통상임금 산정지침’을 통해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노동부는 지난해 9월에도 이 같은 내용의 예규를 재고시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노동부는 특히 ‘매달 지급되는 급여’만 ‘정기성’이 있다는 입장이다. 법원이 2~3개월마다 또는 6개월에 한 번씩 지급되는 상여금에 대해서도 정기성을 인정하는 반면 노동부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은 97년 “통상임금을 둘러싸고 다툼이 있는 경우 재판절차를 통해 확정해야 한다”며 “행정기관의 유권해석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성질상 통상임금에 포함돼야 할 수당이 통상임금에서 제외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이는 근로기준법에 정한 기준에 달하지 못하는 근로조건을 정한 것으로 무효”라고 판결한 바 있다. 노동부 예규가 법적 강제성을 띠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법원 판결과 다른 예규가 유지되면서 혼란이 가중됐다. 금속노조 관계자는 “지난해 금아리무진 판결 이후 전국적으로 70여개에 이르는 현장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라며 “대법원이 통상임금의 범위를 확대하고 있음에도 노동부가 대법원 판결 취지에 맞게 행정지침을 바꾸지 않아 불필요한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누구를 위한 노사정 대화인가=노동부가 다음달부터 통상임금의 상여금 포함 여부를 놓고 노사정 대화에 나서겠다고 밝힌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노동부 관계자는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개선할지 차분하게 논의해 보자는 취지”라며 “논의 의제나 방식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돈이 걸린 문제인 만큼 노사의 입장은 팽팽하게 맞서 있다. 한국경총 등 경영계는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면 기업들이 일시에 38조5천509억원을 부담해야 한다"며 “노동부 예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부 보수언론은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통상임금에 대한 기존의 판결을 뒤집어야 한다"는 무리한 요구마저 내놓고 있다.

반면 노동계는 “노동부가 예규만 고치면 된다”고 반박한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노동부가 잘못된 예규를 고수해 개별적 노사갈등이 발생했고 사회적 갈등으로 비화됐다”며 “노사정 대화 자체를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설사 노사정 대화가 성사돼 타협안이 만들어지더라도, 노동자들의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노사정 대화로 통상임금이 줄어든다는 여론이 조성되면 너도나도 ‘법이 바뀌기 전에 소송부터 걸고 보자’고 뛰어들 여지가 크다”며 “섣부른 노사정 대화가 사회적 혼란을 키우고, 대형로펌들의 호주머니만 채워 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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