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선 양말과 속옷, 세면도구와 보조배터리 따위가 나와 여느 여행 가방과 다르지 않았다. 노조 조끼와 깔판이며 핫팩과 높은 산에서나 쓸 법한 두툼한 장갑이 딸려 나와 조금 달랐다. 청와대 앞길 비닐집에 사는 이재열 공무원노조 서울본부 부본부장의 짐이다. 농성장에 널린 가방 중에 가장 말끔한 것이었다. 여행용으로 산 것인데 농성용으로 쓴다고 했다. 농성장 당번이 돌아와 짐 꾸릴 때마다 해고자 처지를 깨닫는다고. 다시 여행용 가방으로 쓰고 싶다며 웃었다. 옆자리 누구나가 예상했던 것들이 거기 들었다. 길바닥 생활 오랜 사람들은 남의
어느 무명의 묘비처럼 영정은 그림과 이름 없이 빛났다. 하늘과 거기 흐르던 구름을 네모 틀에 품었다. 종종 그 앞에 선 사람들 온갖 꼴을 담았다. 거울이었다. 겨울, 국화가 얼었고 사람들은 울었다. 한 무리의 노동자들 팻말 들어 꼭 영정 같은 모습으로 그 앞에 줄줄이 섰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거울에 비쳤다. 거기 영정에 누가 들어도 놀라울 것 없었다고, 사
겨울, 눈이 내리고 사람은 오른다. 바람 잘 날 없어 현수막이 운다. 아랫자리 지켜 선 사람들은 목 꺾어 바라보다 몰래 운다. 목재 화물운반대 땔감 삼아 피운 불에 언 몸을 녹인다. 아지랑이 타고 재가 오른다. 줄 따라 보조 배터리가 오르고 빈 것이 내려온다. 두 번째 겨울, 기온은 낮고 사람은 저만치 높다. 연기 오르지 않는 굴뚝을 향해 땅바닥을 기어간
사람 웃기기는 쉬워도 울리기는 어렵다고, 오래전 마당극 만들면서 배웠다. 상황을 비트는 말 한마디로, 넘어지고 부딪히는 과장된 몸짓으로도 웃음은 터졌다. 그러나 눈물은 슬픈 감정을 땔감 삼아 물 데우는 일이었다. 열기가 차곡차곡 쌓이다 어느 순간 왈칵 끓어넘친다. 쉽지 않아 속이 끓었다. 웃는 사람 사진 찍기는 수월해도 우는 사람 담기가 난감하다. 카메라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조합원들이 27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 앞에 모였다. 이들은 노동부에 사측의 부당노동행위를 전수조사하라고 촉구했다. 지부는 최근 회사가 조합원 성향을 분류하고 선거에 개입하려 한 정황이 담긴 '31대 대의원선거 활동 계획' 문건을 폭로했다.
비정규직 그만쓰‘개’ 1천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단 소속 회원들이 26일 오후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문재인 대통령이 대화에 나설 것을 재차 촉구했다. 이들은 "문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첫 외부일정으로 인천공항을 방문해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할 때 인천공항 비정규직이 흘렸던 기쁨과 희망의 눈물은 실망과 분노
언젠가 엄마가 영화표를 한 장 줬다. 노동조합에서 나온 거라고 했다. 어느 공장 식당에서 밥 짓는 일 했던 엄마는 으레 그 회사 직원이었고, 노조 조합원이었다. 알게 뭐람, 공짜라면 그저 좋아 혼자 극장으로 내달렸다. 이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종종 버거웠다. 돌아와선 재밌었다고만, 엄마에게 말했다. 자율적이지
비 요란스레 쏟아졌다. 우수수 낙엽 졌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선 사물놀이패가 무대에 올라 영남농악을 두들겼다. 관계자 몇몇이 흥을 돋우느라 그 앞에서 비 맞아 가며 덩실댔다. 팔도 농촌 특산물 천막에는 낙엽만 다닥다닥 붙었다. 가을, 광장엔 이런저런 축제가 많았으니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비가 온대도 약속은 지켜야 했다. 청와대 앞길엔 약속을 지켜라, 구호
가을인가 싶었는데 겨울 앞이다. 바람에 낙엽 진다. 썩어 흙에 거름으로 들어야 할 것인데,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촘촘한 탓에 쓰레기 신세다. 시설관리 노동자가 빗자루 들고 바쁘다. 화단 가꾸랴, 눈 치우랴, 그도 아니라면 껌을 떼고 여기저기 낡은 것들을 고치고 메꾸느라 실은 사철 바빴다. 밥벌이 방편이었으니 그 길가에 망치질하는 사람 조형물처럼 쉼 없이 움직
곧 넘어가는 누렇고 붉은빛이 여의도 어느 국책은행 외벽에 맺혀 빛났다. 거기 노란 낙엽 더미 위로 시가 흘렀다. 가을에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저마다 노랗고 빨간 나무 아래 서성이던 노동자가 고개 들어 시를 훑는다. 그의 등에도 얼핏 해가 들어 빛났다. 거기 구호가 흘렀다. 진짜 사장이 직접 고용하라, 그건 노동존중 사회의 핵심 약속 중
옥시레킷벤키저노조가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 옥시 본사 앞에서 결의대회를 열고 중앙노동위원회의 원직복직 명령 이행을 촉구했다. 중앙노동위는 옥시가 익산공장 노동자들을 지난해 11월30일 해고한 것이 부당해고라고 판정하고 원직복직과 체불임금 지급을 명령했다. 노조는 "사측은 시간 끌기와 책임회피로 일관한 가습기 참사의 교훈을 되새겨 부당해고를 사
무엇이 평화를 가로막는가. 거리의 예술가들이 물었고, 지나던 시민이 종이에 적어 답했다. 남북의 평화에서 마음의 평화까지 메시지는 다양했다. 나도 취직하고 싶다고 취준생은 적었다. 지난 명절 차례상 앞에서, 어제 또 오늘 평화로워야 할 저녁 밥상 앞에서 간절했던 그 마음일 테다. 포장마차 컵밥을 뒤적거리며, 편의점 삼각김밥 포장을 뜯으면서도 떠나질 않던 생
민복이라 불리는 흰색 옷에 조끼 차림을 한 사람들은 대개 단식을 하거나, 언 바닥을 기거나, 먼저 간 동료의 상을 치른다. 부당함을 말하는 일이란, 소리통을 키우는 일이란 더 큰 고난을 오래 견디는 일이 됐다. 종종 강성노조 오명이 따라붙었다. 자동차 만들던 노동자들이 청에 들어 농성한다. 여럿이 밥을 굶는다. 불법 시정, 뻔한 말을 어렵게도 한다. 적폐
청와대 앞길에 깃발이 천지다. 한반도기 휘날려 적대청산 큰 걸음 내디딘 남북 정상의 만남을 기념했다. 노조 깃발 줄줄이 서 적폐청산 큰 걸음을 촉구했다. 노조할 권리며 불법 시정 따위 법전에 뻔한 말을 내내 읊었다. 노조파괴며 온갖 부당노동행위와 꼼수와 거짓말을 전하던 연사는 금세 목이 쉬었다. 결코 평화란 없다던 노랫말 따라 몸짓 공연이 격했다. 노조를
머리칼은 딱 머털도사인데, 왜 도술은 못 부리나. 대한문 분향소 지키던 윤충열씨가 삐죽삐죽 멋대로 뻗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면서 삐죽거렸다. 뽑아서 훅 불어야 한다고, 누군가 비기를 전했다. 뽑는 시늉을 했다. 저 나이에 머리칼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느냐고, 다른 이가 나서서 말렸다. 타박했다. 머리칼만큼 많은 날이었다. 도를 닦았다면 진작 도술에 능했을 터,
경복궁 돌담 따라 오르는 고풍스러운 길. 언젠가 사람들 여길 지나도 될까 망설이다가 돌아섰던 길. 그러나 기어이 촛불 밝혀 행진했던 길. 이제는 연인들의 이색 산책로, 자전거 탄 사람의 운동코스, 셀카 명소다. 그 길 끝 즈음이면 알록달록 농성 천막이 단풍처럼 화려하다. 곧 행진해 올 집회 참가자들이 깔고 앉을 돗자리가 낙엽 더미처럼 쌓여 있다. 계절은 돌
큰비는 흘러 더러운 것들을 씻어 낸다. 길바닥에 개똥 같은 것들이 뒹굴다가도 한바탕 쏟아진 비에 말끔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잘린 사람들은 분향소 천막 부여잡고 죽음을 말린다. 살아 지옥을 견딘다. 9년째다. 언젠가 대테러 진압작전 벌어진 공장 옥상 불구덩이 속에서 두들겨 맞고 피 흘린 해고자가 오늘 경찰청 앞에서 세상 등진 사람의 이름을 부
구름 두텁고 비가 간간이 내렸을 뿐, 한낮 대한문 앞 거리는 평온했다. 종종 해 비쳐 밝았다. 가격표도 떼지 않은 우산 옆에 낀 사람이 돈 아깝다고 투덜대며 걸었다. 결재서류파일 든 공무원들이 시설물을 점검하고 사진으로 기록했다. 성질 급한 플라타너스 잎이 땅에 뒹굴다 바람에 굴렀다. 비닐 집 날아갈까 마음 급한 해고자가 그 옆 태극기 장수와 얘기하던 동료
안전제일이라고 온 데 많다. 그 말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어서 종종 그냥 넘기기 일쑤다. 건강 챙겨라, 항상 몸조심해라, 밥 챙겨 먹어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엄마 잔소리 같은 것이었다. 한 귀로 듣고 흘려 온 말이다. 어디 아프고 나서야, 큰 사고를 겪고서야 눈물로 곱씹는 말이다. 언젠가의 참사 앞에서 사람들은 안전사회 건설을 눈물로 다짐했다. 생명
광장 건너편 낮은 자리에서 가수 박준이 노래한다. 작은 모금함을 앞에 뒀다. 뇌출혈로 쓰러진 LG유플러스 비정규 노동자에 작은 도움 주기를 노래 틈틈이 알렸다. 일어나, 김광석의 노래를 불렀다. 기타를 퉁겼다. 노조 깃발 들고 그 길 지나던 사람들이 습기 머금은 지폐를 통에 넣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일어나, 다시 한 번 해 보는 거야, 가수 박준은 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