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노총 소속 청년 노동자들이 지난 3월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정부의 근로시간제도 개편안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던 중 과로로 쓰러진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의식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정부가 현행 ‘주 52시간 상한제(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유연화를 추진하기로 한 업종의 ‘과로 위험도’가 다른 업종보다 많게는 두 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올해 3월 시동을 건 전면적인 ‘연장근로 관리단위 확대’에서 한발 물러나 일부 업종·직종을 대상으로 하는 ‘선별적 유연화’로 방향을 틀었지만, 과로가 일상화된 업종의 실상을 외면한 정책 추진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3일 ‘근로시간 제도개편 대국민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연장근로 관리단위를 확대하는 ‘예외’ 업종을 뒀다. 현행 1주인 연장근로 관리단위 확대가 필요한 업종(복수응답)으로 △제조업(노 55.3%·사 56.4%) △건설업(노 28.7%·사 25.7%)을 고른 응답 결과를 근거로 삼았다. 직종에서는 노사가 △설치·정비·생산직(32%·31.2%) △보건·의료직(26.8%·26.4%) △연구·공학·기술직(22.2%·22.8%) 분야에서 연장근로 개편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노동부는 해당 업종·직종에 한해 노사가 원하면 연장근로 관리단위에 선택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추진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런데 정작 통계 결과는 해당 업종·직종의 과로 위험성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식료품·기계 제조업 노동자, 과로 위험 높아

26일 <매일노동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유연화 추진 업종의 ‘뇌심혈관 질환 위험도’는 전체 노동자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대표적 업종이 ‘제조업’이다. 구은회 PL(일환경건강센터)이 올해 발표한 ‘업무상질병 취약업종 탐색을 위한 표준화 질병률비(SIR) 분석’ 논문을 보면 2017~2021년 남녀 모두 뇌심혈관 질환에 취약한 업종으로 식료품 제조업, 기계·기구·금속·비금속·광물제품 제조업, 음식·숙박업이 해당했다. 통계청의 2021년 ‘지역별 고용조사’에서 추출한 전체 근로자집단(표준인구) 대비 개별 업종 남녀 노동자의 뇌심혈관 질환 산재승인 비율을 분석한 결과다.

식료품 제조업의 경우 전체 노동자 대비 뇌혈관 질환의 위험도는 남성이 1.6배, 여성이 2배 높았다. 섬유와 목재 제조업도 남성이 각각 1.5배, 1.6배 더 뇌혈관 질환이 발병할 확률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인쇄·기록매체 복제업의 심장질환 위험도는 남성이 3.4배나 높았고, 뇌혈관 질환 위험도 역시 남성의 경우 1.8배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화학·고무제품 제조업도 남성이 뇌심혈관 질환과 심장질환 위험도는 각각 1.3배, 1.4배 높게 나왔다.

‘기계 부품 제조업체’ 노동자 또한 과로에 시달린 것으로 확인됐다. 기계·기구·금속·비금속·광물제품 제조업에 종사하는 남녀 노동자는 각각 뇌혈관 질환에 걸릴 확률이 1.4배, 1.7배 높았다. 심장질환도 남자는 위험도가 1.4배 높게 분석됐다. 전자부품 공장에서 일하는 비율이 높은 여성노동자는 뇌혈관 질환 발병 위험도가 전체 노동자보다 약 2배(1.9배) 큰 상황에 놓여 있었다. 수제품 및 기타제품 제조업도 남성노동자의 뇌혈관 질환 발병률은 1.6배 더 높았다. 음식·숙박업의 경우 뇌심혈관 질환 위험도가 타 업종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뇌혈관 질환은 남성 2.5배·여성 3.9배, 심장질환은 남성 1.8배·여성 2.8배로 나타났다. 육상운수업 역시 남녀 모두 뇌심혈관 질환 위험도가 각각 2.6배, 2.4배 높았다.

운수 및 창고업과 음식·숙박업은 노동부 설문조사에서 연장근로 단위기간 확대가 필요한 업종으로 노동자와 사업주들이 각각 3순위로 지목했다.

“생산효율 극대화에 제조업 노동자 사지로”

제조업의 들쭉날쭉한 근무시간과 열악한 노동환경이 뇌심혈관 질환 위험도를 키웠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노동부 고시 ‘뇌심혈관 질병의 업무 관련성 인정기준’상 ‘업무부담 가중요인’에 노출된 노동자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업무부담 가중요인에는 △근무일정 예측이 어려운 업무 △교대제 업무 △휴일이 부족한 업무 △유해한 작업환경에 노출되는 업무 △육체적 강도가 높은 업무 △시차가 큰 출장이 잦은 업무 △정신적 긴장이 큰 업무가 포함된다.

이번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제조업체 노동자는 만성과로나 업무 스트레스에 취약할 가능성이 크다. 위험도를 연구한 구은회 PL은 “법정 노동시간을 준수하더라도 근무형태가 불규칙하거나 업무환경이 급변하는 경우 노동자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정부의 노동시간 개편 논의는 노동자 건강보호의 관점에서 신중하게 검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생산의 효율화를 강조하는 제조업 노동자의 취약성이 더 크다고 진단했다. 구 PL은 “생산압박·구조조정·생산효율 극대화·고용불안·신기술 도입 등을 경험하고 있는 직업군에서 뇌심혈관 질환 발생이 증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제조업·건설업 과로사 산재신청 1·2위

정부가 근로시간 유연화를 추진하는 업종의 과로 위험도는 ‘과로사 산재 승인 현황’에서도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지난 3월 근로복지공단에서 받은 ‘2019~2022년 뇌심혈관계질병 사망 업종별 산재 승인 현황’에 따르면 제조업과 건설업의 산재신청 횟수와 승인율이 타 업종에 비해 크게 높았다. 두 업종은 모두 노동부의 설문조사에서 ‘연장근로 관리단위 확대’ 응답이 높게 나타났다.

먼저 제조업의 뇌심혈관 질환 산재신청 건수는 전체 11개 업종 중 가장 많았다. 2019년 203건(승인 80건·승인율 39.4%), 2020년 161건(62건·38.5%), 2021년 195건(75건·38.5%), 2022년 신청 148건(48건·32.4%)으로 조사됐다. 기타 사업(평균 300건)으로 분류된 업종을 제외하면 제조업의 산재신청 건수는 4년 평균 176건으로, 분류 업종 중 가장 많았다. 최근 4년간 승인율은 40%에 육박했다.

건설업의 산재신청 건수가 뒤를 이었다. 2019년 101건(승인 27건·승인율 26.7%), 2020년 92건(26건·28.3%), 2021년 99건(31건·31.3%), 2022년 86건(27건·31.4%)으로 나타났다. 제조업과 건설업의 산재신청 건수를 합하면 전체 11개 업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셈이다. 업무부담 가중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전체 업종에서 불규칙근무·휴일부족·교대제 등으로 과로사한 경우 산재 승인율은 2019~2022년 모두 50%를 상회했다. 노동부 계획대로 일부 업종에 연장근로 단위기간을 확대하면 이런 업무부담 가중요인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주 52시간 미만도 과로 인정 ‘업무부담 작용’

주 52시간을 넘지 않더라도 과로사로 산재를 인정받은 비율도 상당했다. 노동부 고시는 과로 기준으로 발병 전 4주와 1주 평균 업무시간을 각각 64시간과 60시간으로 정하고 있다. 하지만 고시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52시간 미만으로 근무하다가 과로사한 노동자의 산재 승인율은 10~20%대에 달했다. 발병 전 12주간 1주 평균 업무시간이 ‘32시간 미만~51시간 미만’인 경우 승인율은 △2019년 13.3% △2020년 18.6% △2021년 21.1% △2022년 17.3%로 조사됐다. 근무시간이 길수록 대체로 산재 승인율도 높았다. 주 52시간 이상일 경우 산재 승인율은 80%를 훌쩍 넘겼다. 제조업과 건설업은 기본적으로 산재신청 건수와 승인율이 높아 불규칙 노동과 교대제 등 부담요인이 작용해 오래 일할수록 산재로 인정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이 때문에 정부가 연장근로 관리단위를 일부 업종에 한정해 추진하는 ‘선별적 유연화’ 방침은 ‘허점투성이’라는 질타가 쏟아진다. 노동부는 업종·직종별 근로시간과 근로형태에 대한 객관적인 실증 데이터와 추가 실태조사를 거쳐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등 노사정 대화를 통해 대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노동계는 정부가 추진하는 유연화 업종은 제조업·건설업 등 ‘일부’ 업종·직종이 아니라 사실상 ‘전부’에 가깝다며 반발하고 있다.

“노동시간 규제하게 만든 산업인데 완화하나”

안전보건 전문가들도 일부 업종의 연장근로 유연화 방침을 당장 철회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박성우 공인노무사(직장갑질119 야근갑질특별위원회 위원장)는 “정부가 기존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을 그대로 추진했어도 주 타깃은 제조업·건설업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며 “특정 업종·직종에 한해 연장근로 관리단위 확대를 추진하겠다는 얘기는 지난 3월 전면 추진과 다를 바 없고, 결국 같은 결과를 초래해 노동자 건강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뇌심혈관 질환 산재 행정소송의 근로복지공단 패소율도 짚었다. 지난해 법원 확정사건 218건 중 공단의 패소율은 20.2%로 파악됐다. 2017~2021년 공단 패소율도 11.2~20.3%에 이른다. 박 노무사는 “공단의 패소율이 상당히 높고 판례로 인정되는 사례와 비교해 보면 노동부 고시의 과로 기준은 과하게 높다”며 “돌발과로로 인한 과로사 인정 건수가 단기과로보다 조금 더 많다는 점을 보면 업무부담 가중요인이 많은 업종의 과로가 그만큼 심하다고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제조업·건설업의 ‘산재승인 건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최민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우리나라는 산재 보고 자체가 적어 단순히 승인 건수를 두고 특정 업종이 위험하다고 보기에는 제약이 많다”면서도 “이미 과로사 산재신청과 승인이 많은 업종들에서 연장근로 관리단위를 더 넓히면 현재 산재인정 기준을 넘어 과로사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아울러 “산재보험 가입자수만 제조업 노동자가 약 400만명이고, 건설업도 200만명이 넘는다”며 “두 업종은 노동시간 규제가 만들어진 전형적인 산업인데 규제를 더 풀어야 한다는 정부 방침은 터무니없다”고 비판했다.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정부계획 시행하면 업무불규칙성 높아져”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은 “산재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 뇌심혈관 질환에 산재신청 자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과로와 스트레스가 다발했다는 의미이며, 높은 승인율도 장시간 노동 등 업무가중 체계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해당 업종의 고용 확대와 업무부담 분산을 통해 노동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보다 법정 노동시간 상한을 높여 업무 불규칙성을 늘리려는 시도는 오로지 기업 이익만을 대변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날을 세웠다. 중대재해전문가넷 공동대표인 권영국 변호사(법무법인 두율)는 “연장근로 관리단위 확대가 필요하다는 업종일수록 불규칙 노동과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한다”며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안은 과로를 부추기고 건강권을 해치는 반노동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노동부 설문조사 자체가 왜곡됐다는 비판도 강하다. 김현주 이대목동병원 교수(직업환경의학)는 “연장근로 관리단위 확대에 관한 조사 자체가 복수응답이라서 동의율이 50%대로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그다지 높은 수치가 아니다”며 “1개 업종·직종을 제외하면 비동의가 더 많은데 이 결과를 두고 정부가 ‘곡학아세’하고 있다. 해당 업종은 안전보건관리체계도 약하다”고 지적했다. 손익찬 변호사(공동법률사무소 일과사람)는 “제조업·건설업은 노동강도가 높은 대표적인 업종이라 노동시간이 증가하면 과로성 질환이 증가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며 “특히 건설업은 지금도 기본 5.5일을 일하고 있어 더욱 위험해질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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