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이미지투데이

뮤지컬에서 합창이나 군무를 담당하는 ‘앙상블 배우’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법원 첫 판결이 나왔다. 뮤지컬계에서 배우의 근로자성이 인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계약의 형식이 아닌 ‘실질’을 반영한 근로자성 판결이 확대되는 추세다. 법원은 배우들이 받은 출연료의 대가성과 노무제공의 계속성·전속성을 인정했다.

‘공연출연계약’에 공연 횟수 따라 출연료 지급

31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재판장 박정대 부장판사)는 뮤지컬 앙상블 배우 A씨 등 2명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간이대지급금 부지급처분취소 소송에서 지난 26일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간이대지급금’ 제도는 정부가 체불 사업주를 대신해 노동자에게 우선 임금을 지급하고 이후 사업주에 청구하는 제도를 말한다.

소송의 발단은 뮤지컬 공연제작업체와 2020년 1월부터 같은해 2월28일까지 ‘공연출연계약’을 체결한 A씨 등의 임금이 밀리면서 시작됐다. A씨 등은 주연 배우 뒤에서 코러스를 넣거나 춤을 추는 역할을 담당했다. 총 50회의 공연에 따라 출연료를 지급하기로 하면서 횟수를 지키지 못하면 감액된 개런티만 받을 수 있도록 정했다.

그런데 업체는 두 명의 배우에게 각각 142만5천원·180만원의 임금을 체불했다. 그러자 A씨 등은 법원에 지급명령을 신청했고 2021년 7월 확정됐다. 배우들은 금품청산의무를 위반했다며 업체 대표도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A씨 등이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혐의없음)했다.

공단의 문도 두드렸지만, 답변은 같았다. A씨 등은 지난해 5월 간이대지급금 지급을 청구했지만, 공단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성을 부인했다. A씨 등은 그해 10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출연료는 노무 제공의 대가로 지급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계약의 형식에도 불구하고 원고들은 실질에 있어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법원 “공연에 종속, 출연료는 노무제공 대가”

법원은 배우들의 손을 들어줬다. 먼저 ‘출연료’는 노무 제공에 대한 대가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출연료는 근로시간에 비례한 것이 아니라 공연 단위로 정했으나 이는 출연 횟수와 연습 기간에 따라 대략의 노무제공 시간과 강도가 예상이 가능한 공연 출연 계약의 특성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며 “회사가 추가 역할을 요구할 경우 ‘초과수당’을 지급할 수 있도록 정했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배우들이 창작력을 바탕으로 독립된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제작사의 공연사업에 종속돼 정해진 대가만을 받아 공연 흥행 여부에 따른 이윤 창출과 손실 초래 등 위험을 스스로 안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우들이 제3자를 고용하는 행위도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해석했다.

특히 군무와 합창 역할을 하는 ‘앙상블’의 특성이 반영됐다. 재판부는 “감독들은 오디션을 통해 앙상블 배우를 선발한 뒤 각각의 배역을 부여하고 이에 맞는 동선과 합창·군무 내용을 구상하게 된다”며 “배우들은 업무 내용을 변경할 수 없고, 이를 거부할 경우 회사는 계약을 해지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감독들이 배우들의 춤과 노래에 관해 구체적으로 지휘·감독했다는 의미다.

뮤지컬 공연업체 관계자가 앙상블 배우들의 합창녹음 일정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지한 내용. 법원은 앙상블 배우들이 감독들로부터 구체적인 지휘·감독을 받았다고 보고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성을 인정했다. <앙상블 배우측 제공>
▲ 뮤지컬 공연업체 관계자가 앙상블 배우들의 합창녹음 일정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지한 내용. 법원은 앙상블 배우들이 감독들로부터 구체적인 지휘·감독을 받았다고 보고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성을 인정했다. <앙상블 배우측 제공>

‘예술인’ 이유로 사각지대 “전향적 판결”

오디션을 통해 선발돼 ‘자율성’이 있었다는 업체측 주장도 배척했다. 주·조연 배우들과 달리 앙상블 배우는 감독의 지시에 따라 통일적으로 움직일 뿐, 개성이 부각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연습 시간도 구속됐다고 봤다. 재판부는 “앙상블 배우들이 담당했던 역할 특성상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개별 연습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근로자성 판단 기준인 노무제공의 ‘계속성’과 ‘전속성’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회사는 경쟁 관계에 있는 공연의 출연을 금지했다”며 “원고들이 다른 공연에 출연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설령 배우 중 일부가 타 공연에 출연했더라도 전속성이 부정되지 않는다고 봤다. 취업규칙이 없는 점도 ‘일용직’이나 ‘단기계약직’과 비슷한 성격의 노무제공에서 비롯됐다고 해석했다. 4대보험 미가입 역시 ‘회사가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에서 임의로 정한 사정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이번 판결은 ‘예술인’이라는 이유로 뮤지컬 배우의 근로자성을 부인한 관행을 탈피했다는 데에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2021년 7월 뮤지컬 배우의 근로자성에 관해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를 통상적인 근로관계에서의 사용자 지시에 따른 노무제공과 동일하다고 평가하기 어렵다”고 결정한 바 있다. ‘예술인’ 신분으로 공연 출연계약을 맺은 당사자라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이 전향적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A씨 등을 대리한 강은희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고용노동청에서 뮤지컬 앙상블 배우에게 간이대지급금(체당금)을 지급한 사례가 있었으나 법원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고 확인한 사례는 처음”이라며 “임금체불로 권리를 침해받는 배우들이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근거가 생겨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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