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이 사업장 ‘특성’에 맞는 구체적인 안전보건관리체계를 마련하지 않았다면 유죄로 인정돼야 한다는 취지의 법원 판결이 나와 주목된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이 정한 ‘사업장 특성에 따른 유해·위험요인 확인·개선 절차’를 구체적으로 판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에 대한 법원의 처벌이 관대하다는 비판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월27일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이후 5번째 선고도 원청 대표는 실형을 피했다. 한국제강 대표에게 징역 1년이 선고된 사건을 제외하면 모두 집행유예로 기록됐다. 검찰과 사법부의 사고 ‘억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하청노동자 철근 맞아 사망’ 원청 대표 집유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형사5단독(김윤석 판사)은 지난 6일 오전 중대재해처벌법(산업재해치사)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경기 부천시 소재 건설사 ‘건륭건설’ 전 대표 A(52)씨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건륭건설은 상시근로자가 18명이지만, 공사금액이 88억원이라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이 됐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원하청 현장소장과 하청 대표(실 경영자)에게는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하청 소속 철근 작업반장과 크레인 운전기사는 각각 금고 1년과 금고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원하청 법인에는 각각 벌금 2천만원과 1천500만원이 부과됐다.

A씨는 하청노동자 B(사망 당시 37세)씨가 지난해 3월9일 고양시 덕양구 한 상가 신축공사 현장에서 크레인에서 떨어진 무게 약 190킬로그램의 철근에 머리를 맞아 숨진 사고와 관련해 안전보건 확보의무를 다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 크레인에 두 줄이 아닌 ‘한 줄’로 묶은 철근이 풀리며 사고가 난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A씨가 △유해·위험요인 확인 및 개선 절차 마련 △안전보건 관리책임자 업무수행 평가기준 마련 △도급업체의 산재예방을 위한 조치 능력과 기술에 관한 평가기준·절차 마련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모두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4조가 정한 내용이다.

법원 “위험성 실질적 확인했다면 사고 안 일어났다”

법원은 공소사실을 대부분 인정했다. 특히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이행’에 관한 법원 판단이 눈여겨볼 대목이다. 원청측은 “안전보건 전문가와 컨설팅 및 자문계약을 체결해 초청강연과 자문을 받았다”며 “안전보건경영시스템 매뉴얼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 판사는 “이를 ‘공사현장의 특성에 따른’ 유해·위험 요인을 확인·개선하기 위한 업무절차라고 볼 만한 자료가 없다”고 지적했다. 사측이 주장한 매뉴얼은 ‘일반적인 공사현장에서 지켜야 할 매뉴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위험성 평가’ 역시 부실했다고 판단했다. 원청은 지난해 상반기 두 차례 위험성 평가를 실시해 평가표를 작성했다. 이와 관련해 김 판사는 “이는 다른 공사현장 경험 등을 기초로 형식적으로만 작성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위험성 평가표에는 크레인 작업시 H빔을 1줄로 결속해 인양할 경우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 2줄로 결속해 수평을 유지해야 한다는 취지로 기재됐으나 개선 절차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며 “이후 작성된 평가표에는 해당 위험요인에 대한 평가가 누락돼 있고, 한줄걸이 작업의 위험성 개선이 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안전보건 관리책임자의 업무수행 평가방법과 기준을 갖췄다는 원청 주장도 배척했다. ‘일반적인’ 기준에 그쳤다는 것이다. 나아가 안전보건 확보의무와 하청노동자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도 넉넉히 인정했다. 김 판사는 “위험성 평가표에 위험요인에 대한 평가가 누락돼 작업의 위험성이 개선되지 않아 사고가 발생했다”며 “위험성을 실질적으로 확인하고, 이를 개선하는 절차가 마련됐다면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실효성 지적은 의미, 양형은 여전히 미흡”

이번 판결은 ‘실질적인 매뉴얼’ 마련을 강조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게 법조계 판단이다. 중대재해 예방과 안전권 실현을 위한 학자·전문가 네트워크(중대재해전문가넷) 공동대표인 권영국 변호사(법무법인 두율)는 “형식적 절차나 기준이 아니라 공사현장의 특성과 노동자들의 참여를 통해 실질적인 위험요인을 찾아내고 그 특성에 맞는 평가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기업에서 중대재해 사건을 주로 담당하는 한 변호사는 “인과관계 주장이나 혐의를 다투는 부분을 법원이 유죄로 인정한 점은 의미가 있다”며 “기업에서는 처벌 자체보다는 어떤 점이 유죄로 인정됐는지를 분석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형량은 여전히 한계라는 목소리가 높다. 법원은 사고 당시 신호수 업무를 맡았던 피해자의 과실이 사고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며 유리한 정상으로 삼았다. 권 변호사는 “경영책임자에 대한 법정형이 징역 1년 이상, 법인은 50억원 이하의 벌금을 고려할 때 억제 효과를 부여하기에는 부족한 솜방망이 처벌이 지속해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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