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입법·사법·행정과 자본이 모두 기업별노조의 관성에 익숙한 상황에서 노동계가 초기업교섭의 의지를 불태워도 성사는 쉽지 않다.

제도적인 개선책은 제시됐다. 최근 민주노총이 추진한 초기업교섭과 단체협약 효력 확장을 뼈대로 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이 그것이다. 지난달 국민동의청원 5만명을 달성해 국회에 제출됐다. 법적으로 초기업교섭의 사용자단체를 소환하고, 단협의 효력확장을 용이하게 만드는 게 뼈대다. 민주노총은 4월27일 국민동의청원을 독려하는 입법운동을 시작하면서 초기업교섭과 단협 효력확장을 ‘불평등·양극화 해소의 정답’으로 제시했다. 윤석열 정부가 노조 때리기의 명분으로 삼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의 해법이 노동자 간 격차 해소라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입법운동은 우리나라 산별노조가 처한 현실을 비춘다.

사용자 지위 누리면서 교섭 거부하는
‘도망간 사용자’

1998년 산별노조 깃발을 든 보건의료노조는 비교적 초기업교섭을 성실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수행한 노조로 꼽힌다. 보건의료노조는 실제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린 2021년 9월2일 보건복지부와 이른바 9·2노정합의를 체결했다. 간병·돌봄비 부담을 완화하고 보건의료 인력의 적정기준과 불법의료 해소 같은 내용을 포함한 이 합의는 보건의료노조의 역사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다.

다만 여전히 산별교섭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07년 119개 병원 노사가 참여했던 산별교섭은 2009년 병원산업사용자협의회가 해산하면서 중단됐다. 2012년 산별교섭이 재개됐지만 핵심인 국립대병원·사립대병원 사용자가 모두 빠져나가 앙상해졌다.

보건의료노조는 의사협회와 병원협회가 사용자단체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중앙연구원장은 “의협이나 병원협회 등은 정부와 수가협상 등을 할 때는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고용인의 임금·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사용자책임에는 소홀하다”며 “노정교섭을 실시해 제도적 개선을 이뤄도 개별병원 등의 교섭이 이뤄지지 않거나 난항을 겪으면 산업군 내에서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무늬만 산별노조,
‘무늬’도 못 만든 산별교섭

한국노총의 대표적 산별인 금융노조는 의제 설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매년 산별중앙교섭을 실시해 연대임금을 구성하는 등 금융노조는 모범적인 단체교섭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은행을 중심으로 출범했다가 지금의 39개 지부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시중은행과 상이한 지부도 생겼다. 이를테면 금융노조에 속한 9개 금융공공기관지부는 산별중앙교섭에서 실시하는 임금교섭이 의미가 없다. 매년 정부가 정하는 공무원 보수에 사실상 종속돼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반대로 금융노조의 공공기관 구조조정 반대 구호에 상당수의 지부가 조응하기 어려운 현실로도 드러난다.

게다가 금융노조는 금융산업 내 경비업·콜센터 같은 용역업체 노동자를 울타리 바깥에 두고 있다. 노조 조끼를 벗고 나면 금융노조 조합원이 일종에 이들의 관리자가 되는 관계다.

활성화된 금융노조의 지부별 보충교섭은 산업 내 격차 해소와 방향성이 일치하지 않는다. 산별중앙교섭에서 합의한 내용을 후퇴시킬 수는 없지만 상향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산별중앙교섭에서 한 차례 교섭하고, 다시 지부교섭을 하는 중첩된 구조이고, 이 과정에서 지부 노사관계에 따라 산별중앙교섭에서 합의한 임금 인상률을 상회하는 인상도 이뤄진다.

이 밖에도 사무금융노조 증권업종본부나 유관기관노조가 뭉친 고용노동부유관기관노조 등 산별노조이거나 산별을 지향하는 노조는 많다. 그렇지만 기업별노조 관행이 굳어진 상황에서 이들의 활동은 노동시장 이중구조 같은 구조적 문제 해결보다 규모를 확대해 협상력을 높이는 전략으로서 자리한 상태다.

도망간 사용자를 잡는 방법, 노조법 개정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이런 산별교섭 관행은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에 도움을 주기 어렵다. 원청이 하청노조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거나, 아예 사용자를 찾기 어려운 플랫폼·특수고용직·프리랜서 같은 이들은 이런 전략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정작 교섭을 통해 임금과 처우를 개선할 필요가 있는 노동자들은 교섭장에 들어설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현재의 ‘초기업℃교섭’은 산업 내 규범을 만드는 의미로 작동하기 보다는 유사직종의 협상력 확대를 위한 ‘확장된 기업별 교섭’의 속살을 갖고 있다.

개정안이 타격하는 지점은 이 대목들이다. 우선 초기업교섭을 활성화하기 위해 사용자단체를 의무화한다. 산별노조가 산별교섭을 요구하면 사용자가 이를 거부·회피하지 못하도록 하고 사용자단체를 구성하거나 연합해야 할 의무를 부여한다. 실질적으로 사용자 지위에 있으면서 교섭에 나서지 않는 재계를 겨냥한 것이다.

또 효력 확장 권한을 노동위원회에 부과한다. 노조법은 하나의 사업장 단위에서 동일한 단협을 적용받는 노동자가 과반을 넘으면 해당 사업장 전체에 해당 단협을 적용하는 일반적 구속력과 하나의 지역에서 동종 노동자의 3분의 2 이상이 하나의 단협 적용을 받으면 해당 지역 전체 동종 노동자에게 단협 효력을 확장하는 지역적 구속력 조항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지역적 구속력 적용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워 사실상 사문화했다. 개정안은 일반적 구속력 조항에서 근로자 과반 조건을 삭제하고, 지역적 구속력은 산업과 업종을 포함한 형태로 확장해 중앙노동위원회가 결정할 수 있도록 절차를 바꿨다.

노조법 바뀌어도 노조 안 바뀌면 제자리걸음

다만 전문가들은 노조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초기업교섭이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개선할 대안인 것은 맞지만 지금 형태로는 제도화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남신 서울노동권익센터 소장은 ‘선사례’를 축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소장은 “프랑스 같은 단협 효력 확장 제도화가 가장 좋지만 중장기적으로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노조 조직률을 현행보다 더 끌어올리는 것도 난망하다”며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선도적으로 한 사례나 임금연대 같은 모범적 사례를 축적하고 이런 사례가 주류가 됐을 때 노동운동에 대한 이미지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단협의 법적 지위가 공고하므로 이를 활용해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며 “어려운 과제지만 이렇게 하지 못하는 정규직 노조를 비난하는 것은 되레 하책”이라고 짚었다. 원청 정규직 노조가 단협으로 보장받는 권리를 문제삼을 게 아니라 모든 노동자가 단협을 체결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도 “제도가 바뀐다고 기업별 교섭에 익숙한 사람들이 초기업교섭으로 바로 전환할지는 미지수”라며 “제도 변화를 이끄는 것도 물론 쉽지 않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초기업교섭으로 호응해 가는 변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단체교섭과 단협의 본래적 의미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실정법상 정의를 넘어 노동자가 집단을 형성해 사용자쪽과 대등하게 대화하고, 적정한 임금과 노동조건을 협의해 규약을 만드는 행위 자체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연구위원은 “화물운송노동자의 안전운임제를 노조법상 단협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노사가 만나 노동시장의 노동조건과 규범을 만들고 논의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단체교섭과 단협의 본래적 의미와 같다”며 “실정법상의 좁은 의미의 단체교섭과 단협에 갇히지 말고 노동자와 사용자의 대등한 지위에서 근로조건을 결정한다는 실질을 평가하고 보호·확산할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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