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하청노동자 고용안정·처우개선을 가장 쉽게 해결할 방법은 교섭이죠. 원청이 해준다고 하면 바로 해결됩니다. 하청노동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요. 그런데 정규직화하자고 하면 원청이 교섭에 나옵니까? 불법파견 정황이 뚜렷한 하청노조가 교섭 요구해도 안 나오는데, 합법 도급으로 포장된 곳은 더욱 안 나오겠죠. 하청노조는 뭘 할 수가 없습니다.”

원청을 대상으로 근로자지위확인(불법파견)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금속노조 비정규직지회 간부 A씨의 말이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하청노동자 노동조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데 사회적으로 이견이 없다. 문제는 방법이다.

정부·국회 손 놓는 사이
하청노동자 20년 투쟁으로 내몰려

정년을 보장하는 안정적 고용, 근로기준법을 상회하는 복지,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권리. 원청 정규직 노동자와 하청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을 결정짓고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만든 중심에 단체협약이 있다. 정규직노조는 ‘단협 후퇴 불가’를 기본원칙으로 삼아 단체교섭으로 보다 나은 노동조건을 만들고 끊임없이 상향시켜 왔다. 노조의 당연한 임무이자 역할이다.

하청노조는 이런 노조의 당연한 임무·역할을 할 수가 없다. 최근 각종 간접고용 사업장에서 나오는 불법파견 소송 결과와 노동위원회 판정에서 확인되듯이, 대부분 하청사는 원청에 인력공급을 해주는 용역사에 불과하다. 인력 공급업체에 불과한 하청사와의 교섭에서 노조가 고용·복지·노동환경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얻어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원청 정규직 전환으로 하청노동자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외환위기로 제정된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로 급격히 양산됐고,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차별을 공고히 하는 간접고용 노동자 문제를 알린 것은 정부나 국회가 아니다. 노동자들이 돌파구를 만들어 보려고 했다. 그 앞에 완성차 비정규직 노조가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완성차 사업장 등 초기 하청노조들의 탄생 목표는 정규직 전환 그 자체에 있지 않았다.

이들은 기존 제도와 법률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노조를 조직하고 원청을 상대로 집단적 행동으로 불법파견을 공론화했다. 2003년 127명의 발기인으로 출범한 현대차 비정규직노조가 대표적이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역사는 불법파견 투쟁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운동 발생 초기 원하청 노동자 공동으로 조직화와 투쟁을 전개했고, 이후 비정규직노조의 독자 교섭 노선 채택으로 연결된다. 현대차 원하청 문제는 2010년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2010년 7월 대법원은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해고된 최병승씨의 사용자는 원청 현대차라고 판결했다. 불법파견 소송의 원조다. 이때만 해도 현대차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봤다. 그해 10월부터 현대차 울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 500여명은 울산공장 도어탈착(CTS) 공정 등을 점거하고 생산라인을 세웠다. 최근 대법원이 불법파업이라도 조합원 개인에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시한 그 유명한 사건이다.

불법파견 판결 이후에서야 움직이기 시작한 현대차는 신규채용·하청의 진성도급화·촉탁직 채용 등의 카드를 대화 테이블에 던졌다. 정규직 전환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고 느끼는 조합원들 속에서 비정규직노조(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는 특별교섭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신규채용 방식의 특별교섭 합의는 비정규직노조 내부를 흔들었다. 법원 판결보다 하향된 조건의 합의에 반발하는 이들, 오랜 투쟁에도 현대차에 불법파견 범죄 책임을 묻지 못해 반발하는 이들, 개별적으로 노조를 탈퇴하고 회사 제안에 응하려는 이들이 섞이면서 조직력이 급속히 와해했다. 한때 2천명에 육박하던 지회는 지금 세자릿수 조합원을 유지하기도 버거운 상태다. 재벌 대기업의 불법·불의를 사회적으로 고발하면서 시작한 하청노동자의 20년 투쟁은 어떤 교훈을 남겼을까.

원청의 대화 거부, 장기화하는 소송
“힘들게 세운 노조 지키기도 힘들다”

간접고용 사업장에서 벌어진 비정규직 투쟁은 현대차 사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노조를 통한 정규직 전환 요구 → 원청 대화 거절 → 소송 → 신규·발탁 채용(혹은 자회사 채용) → 비정규직노조 약화라는 전철을 밟았다. 기아차·한국지엠·포스코·현대제철 등에서 이 같은 공식이 반복했다. 소송을 철회하면 자회사로 채용하는 등 원청의 대응은 진화했다. 밟고 싶어서 따라간 길은 아니다.

“불법파견 소송과 관련해 노조 내 고민이 많았다. 소송만 지켜보고 노조가 움직이지 않으면 식물노조로 전락한다. 힘들게 세운 노조를 지키기조차 힘들다. 소송이 지지부진하게 장기화하고 사측이 공세를 시작하면 분열될 우려도 있다. 현대차를 보면서 많이 고민했다.”

이용석 금속노조 충남지부 현대제철비정규직지회 정책부장의 설명이다. 현대제철 사내하청 비정규직은 2016년 1월 불법파견 소송을 냈다. 재판 중 일부가 소를 취하하고 현대제철 자회사로 몸을 옮겼다. 원청의 자회사 전환에 응하지 않은 노동자들은 불법파견 소송으로 버티고 있다. 지난해 12월1일에서야 불법파견을 인정하는 1심 판결이 나왔다. 원청은 대법원까지 지켜보겠다며 장기 소송전을 예고한 상태다.

지회가 법원만 처다보는 것은 아니다. 소송이 진행 중이던 2021년 7월 지회는 원청에 △산업안전보건 △정규직·비정규직 간 차별시정 △불법파견 해소 △자회사 전환 관련 협의 등 네 가지 의제를 요구하며 단체교섭을 제안했다. 원청인 현대제철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사용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하자 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했다. 중노위는 원청이 교섭 대상자라고 판정했다. 다만 교섭의제를 산업안전보건에 국한했다. 현대제철은 대화 범위를 좁힌 중노위 판정도 수용하지 않았다. 행정법원에 부당노동행위 구제재심판정취소 소송을 냈다. 교섭도 결국 법원에서 판단하기 전까지는 한 발짝도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현대제철비정규직지회가 앞으로 걸어갈 길은 분명해 보인다. 원청을 상대로는 지속해 교섭을 요구하고, 법원을 상대로는 재판을 빨리 진행하라고 싸우는 길이다. 이용석 정책부장은 “조합원에게 ‘단결하지 않으면 10~20년 걸리고, 단결하면 기간이 대폭 줄어든다’고 강조한다”며 “조직 단결이 지회 사업의 1순위다”고 말했다. 교섭 상대방이 없는 까닭에 노조 사업 1순위가 노동조건이 아니라 노조를 지키는 것이 된 셈이다.

다른 방향을 선택한 하청노조도 있다. 현대위아 광주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로 구성된 금속노조 광주자동차부품사비정규직지회(현대위아 광주지회)다. 현대위아 평택공장 하청노동자들은 2014년 불법파견 소송을 제기하고, 2021년 7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소송 중 현대위아는 소 취하를 조건으로 자회사 채용을 추진했다. 자회사 채용에 응하지 않은 비정규직을 울산공장으로 발령내는 등 노사갈등이 극심했다. 이 같은 행위가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는 1심 판결이 나온 상태다.

소송 아니면 투쟁 갈림길에 선 노조
노조법 개정으로 제3의 길 열릴까

광주공장 하청노동자도 불법파견 소송을 낼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있다. ‘투쟁으로 돌파’하려는 패기를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다.

“불법파견 소송을 중심으로 사내하청 노조 사업을 했던 사례가 있습니다. 정규직화는 어느 정도 이뤄졌지만 비정규직 모두를 없애지는 못했지요. 자회사 방식도 원칙에 맞지 않고요. 노동자 간 분열과 상처가 많아 남기도 했습니다. 처음 노조(지회)를 만들 때부터 그 방식으로 가는 것은 맞지 않다고 판단한 거고요. 정규직화를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불법파견 소송은 유보해 왔던 겁니다.”

2015년 초대 지부장을 지낸 정준현 현대위아 광주지회 교육위원장의 설명이다. 원청과의 직접교섭으로 불법파견 문제를 해소하려는 지회 노력이 아무런 성과를 못 내는 것은 아니다. 공정을 가리지 않고 제조업 원하청 구조는 불법파견에 해당한다는 판례가 쌓이면서 대화의 물꼬는 트였다. 지난해 원하청 노사공동 고용안정협의체를 구성해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다.

사실 하청노조가 교섭으로 차별과 고용의 불이익 문제를 해소하기란 실리적으로도 쉽지 않다. 불법파견 소송에서 승소하면 파견법 적용을 받는 2년을 제외한 나머지 근속기간에 대한 체불임금까지 돌려받을 수 있다. 교섭에서는 이런 결과를 내기 쉽지 않다. 노조 요구 100%를 원청이 수용해야 불법파견 승소의 효과를 낸다. 개별 노동자 입장에서는 소송의 유혹이 매우 강렬할 수밖에 없다. 현대위아 광주지회는 원청에 합리적 수준에서의 직접고용 대타협을 제안한 상태다. 근속 100%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원청은 그래도 답이 없다.

원하청 교섭으로 불법파견 문제를 깔끔하게 해소한 사례로는 금호타이어가 유일하게 거론된다. 불법파견 소송 2심을 진행 중이던 지난 2021년 12월 금호타이어와 금속노조는 하청노동자 정규직화를 합의했다. 근속연수를 인정하고 소송에 불참한 노동자도 모두 대상에 포함했다. 패소 판결이 명확해지자 사측이 먼저 대화를 요청해 전격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제조업·완성차 하청노조의 지난 20년은 원하청 교섭이 불법파견·사업장 이중구조 해소의 지름길일 수 있다는 발자국을 남겼다. 최근 앞선 노동자들이 걸었던 첫 발자국 앞에는 이제 합법도급으로 취급받는 간접고용·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서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택배노동자 등이다. 노조를 만들자 원청은 하나같이 모두 숨어 버리는 전략을 택했다. 원청에 사용자 책임을 부여하자는 취지의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의 제일 앞줄에는 이들이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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