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한국도로공사 용역업체 노동자의 ‘자회사 정규직 전환 기대권’을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이 처음으로 나왔다. 도급업체의 용역업체 노동자들에게 고용승계 기대권이 인정된 경우는 있었지만,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에 따른 법적 분쟁에서 정규직 전환 기대권이 인정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의 정규직 전환 지침과 노·사·전문가 협의에 따라 고용승계 하기로 했다면 이를 이행해야 한다는 취지다. 자회사는 시설관리업무를 단속적 업무로 승인받기 위해 용역업체 노동자들에게 합의서 제출을 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용역업체 직원에 ‘단속적 업무’ 합의서 요구
노동부 뒤늦게 승인 취소 “단속 업무 아냐”

21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한국도로공사 시설관리(주)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지난 15일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소송이 제기된 지 4년 만의 최종 결론이다.

사건은 도로공사 시설관리업무의 고용승계 과정에서 발생했다. 도로공사는 본사 사옥의 시설관리를 1년 단위로 외주 용역업체인 B사에 맡겨왔다. 2015~2016년 도로공사가 작성한 과업지시서에는 ‘용역업체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고용을 승계해야 한다’는 조항이 담겼다.

이후 2017년 7월 발표된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에 따라 자회사를 설립해 시설관리업무를 도로공사 시설관리에 위탁하고, B사 소속 직원들을 자회사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도로공사 시설관리는 노·사·전 협의에 따라 2018년 6월 도로공사의 100% 출자로 설립됐다.

그런데 도로공사 시설관리는 B사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과정에서 ‘격일제 교대근무 형태의 단속적 근로조건’에 관한 합의를 요구했다. 단속적 업무에 대해 고용노동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 휴게·휴일 규정을 배제한 임금체계 개편을 시행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B사 소속 25명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정비 업무를 하던 A씨는 거부했다. 휴게시간이 보장되지 않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실제 B사는 단속적 업무에 대한 고용노동부 장관의 승인을 받지 않은 채 격일제 근무를 시키면서 연장근로수당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노동청은 2018년 자회사에 단속적 업무를 승인했다가 시설관리가 단속적 업무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2020년 12월에서야 승인을 취소했다.

대법원 “도로공사가 채용 주도, 채용 신뢰해”
“노동부 승인 위해 합의서 강요, 합리성 없어”

A씨는 부당해고라며 경북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를 신청했다. 정부 지침에 따라 자회사 정규직으로 채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경북지노위는 고용승계 기대권은 인정되나, 전환채용 조건을 거부했으므로 해고에 합리적 이유가 있다며 구제신청을 기각했다.

하지만 중노위 판단은 달랐다. 노·사·전 협의에 따라 전환 채용의무가 있는데도 A씨가 합의서 제출을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고용승계를 거부한 것은 부당하다고 판정했다. 그러자 사측은 2019년 5월 소송을 냈다. 별도의 채용을 통해 새로운 근로계약을 체결한 것이므로 갱신기대권의 전제가 되는 ‘기간제 근로계약’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2심은 정규직 전환 기대권을 인정하면서 채용 거절에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판단도 같았다. 우선 용역업체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채용에 대해 신뢰했다고 봤다. 대법원은 “정부 지침에 따라 자회사를 설립해 용역업체 소속 근로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채용하기로 하고, 노·사·전문가 협의회에서 전환채용의 요건과 절차를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도로공사가 자회사 설립과 채용 과정을 주도했다는 점도 근거가 됐다. 대법원은 “도로공사가 부여한 신뢰는 실질적으로 자회사인 원고가 부여한 신뢰와 다름 없다”고 판시했다. 특히 시설관리는 상시·지속적인 업무이고, 고용승계 관행이 이어졌으므로 용역업체 노동자들이 자회사에서 계속 근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더욱 컸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를 전제로 채용 거절에 합리적 이유도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원고는 시설관리업무가 단속적 근로에 해당하지 않는데도 승인받기 위해 합의서 제출을 요구했다”며 “합의서를 제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채용을 거절한 것은 근로기준법에 어긋나는 근로조건을 거부했음을 이유로 삼은 것으로서 합리적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정병민 변호사(공공운수노조 법률원)는 “최근 하급심에서 공공부문 가이드라인과 관련해 전환 기대권 자체가 부정되는 경우가 많다”며 “대법원이 적극적으로 노사전 협의와 고용승계 조항 등을 해석해서 기대권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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