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캄보디아 노동자 속헹씨가 2020년 12월 한파 속 난방이 되지 않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근로복지공단이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비전문 취업(E-9) 비자로 한국에 온 방글라데시 노동자 라흐(32·가명)씨는 지난해 8월 성실근로자로 재입국했다. 불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닥쳤다. 서울시 구로구 철판 가공업체에서 일하던 라흐씨는 지난해 12월19일 쇳조각이 눈에 들어가 크게 다쳤다. 라흐씨는 “공장장이 잘못 던진 쇳조각에 눈이 맞았다”고 증언했다. 이 사고로 라흐씨의 오른쪽 눈 각막이 찢어졌고, 각막 봉합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 경과가 좋더라도 눈이 원래 기능을 전부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내국인 노동자 기피업종의 인력난이 현실화하면서 윤석열 정부가 외국인력 규모를 확대하고 있지만 산재 위험에 노출된 이주노동자 현실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사업주는 산재가 발생하면 은폐하기 일쑤고, 도움을 청할 곳 없는 이주노동자는 권리 사각지대에 놓였다.

“산재 신청하려면,
사업주의 온갖 방해공작 넘어야”

지난 18일 오후 서울시 구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라흐씨가 “다친 눈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기 무섭게 커피를 쏟고 말았다.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보지 못한 탓이다.

업무 중 재해임이 명백한데 라흐씨는 산재신청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용자쪽이 산재를 신청하면 회사가 피해를 입는다거나 라흐씨가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협박성 발언을 했고, 사장은 아직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조금만 쉬고 복귀하라고 재촉했다. 결국 그는 포천이주노동자센터의 도움을 받아 12월30일 산재를 신청했다.

“병원비도 많이 나오고, 나중에 혹시 안 보이거나 하면 다른 데에서 일하고 싶어도 나중에 일 할 수 없게 되잖아요. 집(방글라데시)에 돌아가도 몸이 안 좋아서 일을 못하게 되면 보상을 받아야 하니까요.” 라흐씨가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책임을 줄이기 위한 사장의 방해는 멈추지 않았다.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하는 서류에 산재 발생 이유를 “철판을 자르고 난 작은 조각을 공장장(사장)이 치우고 있는데 고개를 돌리다가 눈에 맞았다”고 쓰게 했다. 라흐씨에게 사고의 책임을 돌리기 위해서다. 갖은 방해가 있어지만 라흐씨는 포천이주노동자센터의 도움으로 최근 산재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주노동자 산재은폐 수두룩”

위험 업무를 하다 다치는 일은 라흐씨만의 일은 아니다. 라흐씨와 같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동료 3명 중 2명은 업무 중 다친 경험이 있었다. 재해 발생 시점은 다르지만 한 사업장에서 라흐씨를 포함해 이주노동자 4명 중 3명이 일하다 다친 것이다.

해당 업체에서 6년째 일했다는 B씨는 “일하다 손가락 마디가 골절돼 수술을 한 적이 있다”며 “일을 하기 어려워 당시 한 달반인가, 두 달 정도 쉬었는데 월급을 안 줬다”고 다친 부위를 보여줬다. 당시 도움을 청할 곳을 알지 못했던 B씨는 산재신청을 생각도 못 했다. E-9 비자로 1년여 전 해당 사업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C씨도 “호이스트 크레인 고리에 턱이 부딪쳤는데, 1~2주 정도 쉬고 일했다”고 전했다.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했다.

모두 산재은폐로 범죄에 해당한다. 산업안전보건법 57조에는 “사업주는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때에는 그 발생 사실을 은폐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돼 있다. 산재 발생 개요와 원인, 재발방지 계획을 고용노동부에 보고해야 한다. 이를 어길 경우 1년 이하의 징역과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을 수 있다.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인 김달성 목사는 “이주노동자의 산재은폐율은 80%로 추정된다”며 “라흐씨가 산재를 신청하려는 상황에서 겪은 폭언이나 협박은 이주노동 현장에서 늘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2021년 김정우 한국노동연구원 사업체패널팀장이 2011년부터 2017년 사업체패널조사 자료를 활용해 분석한 결과 산재은폐율은 66.6%를 기록했다. 김 목사는 “사업주들은 산재 신청조차 가로막지만, 노동부는 불법을 외면하고 있다”며 “정부는 E-9 외국인 노동자 11만명을 데려온다는데, 이주노동자와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지 않는 현실을 개선할 의지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꼬집었다.

“2017년 이후 산재 해마다 늘어
체류 지원 대폭 확대해야”

2022년 고용노동백서에 따르면 외국인 노동자의 산재 현황은 2017년 이후 매년 증가 추세다. 2017년 6천302명이던 산업재해자는 2021년 8천30명으로 4년 새 20% 넘게 증가했고 2020년 기준 외국인 노동자의 재해 사망만인율은 내국인 노동자의 2배가 넘는다. 코로나19로 2019년 4.87%였던 인구 대비 체류외국인 비율이 2021년 3.79%로 감소한 것을 감안하면 작업환경이 더 열악해졌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이주노동자가 대부분 위험하고 환경이 열악한 50명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서 근무하기 때문이다. 권리 사각지대에 놓인 미등록 체류자가 40만명이 넘는 상황에서 산재 사각지대는 더욱 클 것으로 예상된다.

정영섭 이주노조 활동가는 산재가 오히려 증가한 수치에 대해 “코로나 상황에서 더 위험한 일을 했다는 것”이라며 “노동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사업장 자체의 안전을 위한 설비를 확충할 수 있게 지원하고, 현장 작업과 관련해 모국어로 교육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E-9 비자 노동자의 경우 출국 전후 기본적인 안전교육을 받지만,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게 노동계의 오랜 주장이다.

정부는 구인-구직 미스매치로 발생하는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력을 대폭 확대하는 모양새다. E-9 비자 발급 규모를 지난해(6만9천명)보다 약 40% 높여 11만명으로 늘렸다. 이주노동자 보호를 위해 노동자·사업주를 대상으로 한 지방고용노동관서·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의 체류지원 강화나 통역원 확충 같은 실제적인 지원 방안을 밝혔다.

하지만 이주노동자에게 안전하게 일할 권리 보장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우려는 계속된다. 통역원만 해도 정부는 지난해 11월 말 기준 153명에서 올해 180명으로 늘린다는 계획인데, 이주노동자 증가세를 감안하면 크게 부족하다. 정영섭 활동가는 “정부가 내놓은 정책보다 인프라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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