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막걸리가 잘 넘어가요. 기분이 무겁고 우울하면 (술을) 소량만 먹어도 취기가 오거든요. 소주를 안 먹기 시작한 지 근 20년이 됐고 막걸리만 먹는데, (대법원에서 승소한) 그날은 제가 소주 한 병을 다 먹었어요. 그런데도 취하지 않더라고요.”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장(53·사진)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대법원이 옥쇄파업을 하던 쌍용차 노동자를 경찰이 강제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손해액이 잘못 산정됐다며 항소심 판결을 지난달 30일 파기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사건이 계류된 지 6년5개월 만에 경찰이 헬기·기중기를 본래 용도와 달리 이용해 과잉진압을 시도했고, 진압에 저항한 노동자의 행위는 ‘정당방위’라고 판시했다. 손해배상액 대부분을 차지하는 헬기·기중기 수리비를 다시 산정해야 한다는 이번 판결로 김 지부장을 포함해 손배·가압류로 고통받던 쌍용차 노동자는 큰 시름을 덜었다.

<매일노동뉴스>가 어깨를 짓누르던 손배·가압류 짐을 덜어낸 김득중 쌍용차지부장과 만나 대법원 판결 소회를 물었다. 인터뷰는 대법원 선고 이틀 뒤인 지난 2일 오후 국회 앞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선고 앞두고, 초조 … 하루 전 밤 꼬박 새”

“윤석열 정부가 반노동 정책을 펴고, 공안정국으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선고가 잡히니깐 처음에는 불안감이 있었어요.”

김 지부장은 대법원 선고 열흘 전 선고 기일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랜 시간 기다린 소식이었지만 마음이 복잡했다. 13년 동안의 짐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에 “언젠가 부딪쳐야 하는 일이니 잘됐다” 싶다가도 초조함을 숨길 수 없었다.

“모든게 기각되는 상황은 상상도 안 했어요. 너무 끔찍하니깐요.”

마음을 다잡으며 D-10, D-8, D-5…. 숫자를 세다 보니 선고일이 성큼 다가왔다.

선고 하루 전 잠이 오지 않아 밤을 꼬박 샜다. 김 지부장은 선고 당일 아침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와 정의당이 국회 앞 단식농성을 돌입하는 기자회견장을 찾았다.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다행히 약속은 지켜졌다.

대법원을 찾은 김 지부장은 법정 뒷 편에 앉아 선고를 들었다.

“(대법관이) 파기환송한다는 이야기를 하니깐 (속에서) 뭔가 끓어 올랐어요. 귀를 쫑긋 세우며 판결 내용을 듣는데, 피고가 1번부터 104번까지 있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머릿속이 복잡한데 재판이 끝나고 동료들과 연대해 주셨던 분들이 눈시울이 발개져 나오더라고요. 그때 보고 알았어요. 우리 잘 됐구나.”

대법원에서 처음 이겨 본다는 김 지부장은 “대법원 계단에서 입구까지 가는 거리가 그날따라 너무 짧게 느껴졌다. 발걸음이 너무 가벼웠다”고 그날의 기쁨을 회상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괜찮지 않더라”

선고 직후 대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많은 이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한마음 한뜻으로 쌍용차 노동자와 투쟁해 온 이들도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울지 못했다. 감정을 참는 게 습관이 된 탓이다.

“동료의 죽음처럼 정말 어떤 것으로도 감내할 수 없는 사안들이 있잖아요. 그럴 때 제 감정은 드러내지 않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과제)을 생각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그 사안을 맞닥뜨리려고 해요. 남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거나 하면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고 자기 최면을 걸고요.”

김 지부장은 옥쇄파업 이후 동료 30여명을 떠나보냈다. 정리해고 후 생활고, 경찰의 폭력적 진압 과정에서 다친 마음, 감당하기 어려운 손해배상액 등이 동료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였다.

“해고자 복직” “손배·가압류 철회”

동료를 앗아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싸우는 게 산 자의 도리라 여겼다. 투쟁은 길었고 감정은 무뎌져야 했다. 애써 무딘체하는 감정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새도 없었다.

“저는 괜찮을 줄 알았어요.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상황이고, 고민이나 안 풀리는 일이 있다고 해도 태연하게 사안을 대하는 게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의사 진단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지부가 올해 3월부터 진행한 트라우마 진단을 위한 심리검사에서 그는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혼합형 불안, 우울장애를 진단받았다. 의사는 “파업 관련 스트레스가 트라우마로 작용하면서 오랜 기간 만성적으로 정신적 고통을 겪어 온 것으로 보인다”며 “재판 관련 문제가 겹치면서 정신적 고통이 가중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진단했다. 1년 이상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병원에서 수면을 돕는 약을 처방해 줬지만, 해야 할 일들을 둔 채 잠이 드는 것이 싫어 거를 때가 많다고 한다.

2009년 옥쇄 파업 당시 조직쟁의실장이던 그는 경찰의 헬기와 기중기가 투입돼 아수라장이 된 현장 속 동료들의 비명과 아우성을 들었다. 2013년부터 현재까지는 지부장직을 수행하며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4번의 단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잊지 못하는 그날, 2009년 5월22일”

그의 기억 한켠에 자리 잡은 행복한 장면, 조합원들과의 약속이 고단한 싸움을 버티게 해 줬다.

“2009년 5월22일 총파업을 선언하고 조합원들한테 집에 가서 필요한 생활용품 가지고 다음날 중식시간까지 복귀하라는 지침을 내렸어요. 언론은 불법파업이라고 하고, 정리해고 가짜 명단이 현장에 돌아다니면서 파업 안 하면 (명단에서) 빼 주겠다는 회유와 협박이 난무하는 상황이라 이걸 이겨 내고 참여할 조합원이 얼마나 될까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조합원들이 여기저기서 배낭 메고 들어오는 거예요. 500~600명이던 인원이 1천500명으로 늘어나고…. 그때 그 모습 보고 정말 마음이 벅찼어요.”

“중요한 사안은 숫자로 기억한다”는 그에게 ‘2009. 05. 22.’는 잊지 못할 숫자가 됐다. 당시 그는 조합원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긴다. 우리가 옳다. 진실은 언제든 밝혀질 것이니, 당당하게 임하자.” 동료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동료와의 약속이라 생각한 그는 2018년 9월 노노사정(금속노조 쌍용차지부·쌍용차노조·쌍용차·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해고자 117명 복직 합의, 이번 대법원 판결까지 투쟁을 이어 올 수 있었다.

그와 동료들은 해고자 전원복직 합의 후 간 수련회에서 “우리가 받은 만큼의 나눔과 연대를 적어도 정년퇴직할 때까지 실천하자”고 결의를 모았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투쟁 사업장에 조를 나눠 다니는 형태다.

끝나지 않은 문제
“노조 상대 회사 손배 남아”
“경찰은 소 취하 의견 내야”

이번 대법원 판결로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다. 경찰이 나서 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기존보다 적은 액수더라도 손해배상액이 재산정, 청구될 가능성이 높다. 쌍용차가 금속노조를 상대로 제기한 100억여원 손해배상 소송도 남아 있다.

회사의 손해배상 문제는 2018년 노노사정 해고자 복직 협의 당시 마지막 쟁점이었다. 당시 회사는 (소 취하가) 이사회 승인의결 사항이라 배임이 될 가능성과 국가의 손해배상 소송도 취하되지 않은 상황을 거론하면서 합의에 어려움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지부장은 “올해 8~9월쯤 (쌍용차의 새 주인인) KG그룹과 쌍용차노조가 실무협의하는 과정에서 손해배상 문제를 철회하는 것을 제안했다”며 “KG그룹이 쌍용차 인수 후 새롭게 경영을 출발하는 상황에서 과거 문제를 정리하고, 기분 좋게 출발해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서로의 역할을 제안하는 만남을 추진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쌍용차는 최근 두 번째 법정관리를 거쳐 KG그룹에 인수됐다. 그는 “국가 손해배상 소송의 경우 경찰이 소 취하 의견을 내는 것이 저희들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김 지부장은 손해배상 소송 문제가 해결된 뒤에 먼저 떠난 동료들을 찾아가 인사할 생각이다. 그는 “김주중 동지는 올해가 떠난 지 4년”이라며 “이 문제가 해결되면 그 결과를 가지고 찾아뵐 생각”이라고 전했다. 2018년 6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쌍용차 해고노동자 고 김주중씨는 이번 국가 손해배상 판결의 당사자로, 옥쇄파업 당시 경찰특공대의 진압과정에서 상당한 폭력을 당한 피해자였다.

고통을 견디다 못해 떠난 동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동료가 염원했던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해결해 떳떳하게 (묘지에) 찾아 뵐테니, 그날까지 좀 기다려 달라”는 말을 전했다.

▲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노조 상대 손해배상 소송=노조 말살 무기”

“지부장님에게 쌍용차란 무엇인가요?”

인터뷰 내내 담담하게 과거 기억을 떠올리며 답하던 그의 눈에 처음 눈물이 맺혔다.

“청춘을 다 바쳤죠. 아픈 상처인데 삶의 희로애락이에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어쨌든 그런 생각이 드네요. 함께한 게 30년인데, 30년 동안 웃기도 하고, 화도 내고 했던 시간들.”

그는 1993년 입사해 30여년간 평생 쌍용차 노동자로 살았다. 그중 10여년은 해고자로 공장 밖에 있었다. 2018년 복직 합의 후 두 차례 출근 시기가 지연돼 2020년 5월 출근했다.

현재는 생산혁신팀에 소속돼 동료 공백을 메운다. 산재·파견 등 동료 공백이 생긴 곳에 가 대신 해당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옛 동료들도 만날 수 있어 지금 일이 좋다”고 만족해 했다.

국가, 그리고 사용자의 손해배상으로 사랑하는 동료를 잃고, 고통받아 온 김 지부장은 노동자에게 거는 회사의 손해배상을 “결과적으로 노조 말살”이라고 강조했다.

김 지부장은 “우리 사업장도 그렇지만 다른 모든 사업장들도 손해배상 대상에서 빼 주는 조건으로 민주노조 탈퇴를 요구한다”며 “노동자 개별적 대응이 되지 않아 노조를 만들고, 노동권을 지켜 내는 사업을 해 온 것인데 손해배상 청구가 노조를 말살하고 노동권을 부정하는 무기로 쓰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올해 연말 전까지 노조법 2·3조가 개정될 수 있도록 힘쓸 계획이다. 그와 같은 염원을 가진 노동·시민·사회단체가 지난달 30일부터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거리 위 농성자들의 원하는 바를 이루고, 집에 돌아가면 그도 연말 오랜 시간 동안 미뤄 둔 고향 친구와의 여행을 떠날까 생각한다. 친구들과 처음 잡은 여행계획이다.

남은 바람을 물었다. “내년 말까지만 지부장을 하고 싶다”는 소박한 대답이 돌아왔다. “금속노조 선거방침에 따라 지부가 임원선거 공고를 내고 제대로 선거를 하면 좋겠어요.” 지부장을 한 지 10년차. 어렵던 시절을 지나며 ‘당연히’ 지부장이 됐지만, 이제는 짐을 조금 내려놓고 싶은 모양이다. “근데 저만의 생각이겠지요?” 김 지부장은 웃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