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용노동부

위험성평가가 내년 300명 이상 사업장부터 단계적으로 의무화된다. 위험성평가를 하지 않거나 부실하게 할 경우 시정명령이나 벌칙을 받도록 관련 규정을 바꾼다. 고용노동부는 이런 내용이 담긴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30일 발표했다.

로드맵은 기업 스스로 위험요인을 발굴하고 개선하는 ‘위험성평가’를 중심으로 한 ‘자기규율 예방체계’ 구축을 통해 사망사고 만인율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줄이겠다는 목표를 담고 있다. 지난해 산재사고 사망자는 828명으로 2026년까지 지금의 3분의 1을 줄여야 한다.

노동계는 “이미 실패한 자율안전 정책의 재탕, 삼탕”이라며 “기업에 대한 처벌만 완화할 것”이라고 비판한 반면 재계는 “오히려 규제만 늘어난다”고 반발했다.

“기업, 규제 길들어져 스스로 위험 예방 능력 부재”
위험성평가 2025년까지 의무화, 재해조사 의견서 내년부터 공개

이정식 노동부 장관은 3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브리핑을 열어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발표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산재사고 사망만인율(노동자 1만명당 산재사고로 사망하는 비율)은 0.43명으로 8년째 제자리걸음이다. 노동부는 중대재해가 줄지 않는 이유로 “규제·처벌 위주의 행정으로 기업이 타율적 규제에 길들어져 자체적으로 위험요인을 개선하는 시스템과 역량이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에도 기업이 안전역량 강화에 투자하기보다 대형로펌 자문 등을 통해 처벌 회피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봤다.

이에 따른 해법으로 제시된 것이 ‘자기규율 예방체계’다. 노동부는 영국의 ‘로벤스 보고서’에 주목했다. 1972년 발표한 로벤스 보고서는 촘촘한 법과 규제만으로는 중대재해 예방에 한계가 있다며 사업장의 자율안전 예방체계 수립을 제안하고 있다. 이를 수용한 영국은 지난 50년간 연 1천명의 사고사망자를 200명대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노동부는 ‘자기규율 예방체계’ 핵심수단으로 ‘위험성평가’를 제시했다. 2013년 도입한 위험성평가는 노사가 함께 사업장 내 유해·위험요인을 스스로 파악하고 개선대책을 수립하고 이행하는 제도다. 강제성이 없는 탓에 현장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부는 위험성평가를 내년 300명 이상 사업장부터 의무화하고 2025년 5명 이상 사업장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해 벌칙 조항을 신설하고 중대재해가 발생한 경우 위험성평가 관련한 내용을 수사자료에 적어 검찰과 법원에서 구형·양형 판단시 고려하도록 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동안 ‘수사 중인 사건’이라는 이유로 비공개했던 재해원인 조사 의견서도 내년부터 공개할 예정이다.

안전보건규칙 처벌·예방으로 분류
노동자 제재 위한 ‘표준 안전보건관리규정’ 마련

법규와 행정도 위험성평가 중심으로 개편한다. 정기산업안전감독을 ‘위험성평가 점검’으로 바꾼다. 노동부는 “그동안 사업장에서 감독에 적발되면 개선하기보다는 ‘재수 없다’고 치부하고 넘어가는 관행이 있다”며 “앞으로는 근로자 인터뷰를 통해 위험성평가 결과를 인지하는지, 사고사례가 공유됐는지 등을 점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올해 산업안전감독은 2만7천곳을 대상으로 실시했는데 정기감독 대상 사업장은 1만1천곳이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안전보건규칙)도 전부 개정한다. 현재 679개 조문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규칙을 처벌과 예방 규정으로 분류하겠다는 것이다. 노동부는 내년 상반기 ‘산업안전보건법령 TF’를 운영해 개선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노동부는 노동자의 안전의무도 강조했다. 자기규율 예방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노동자가 안전보건주체로서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하고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 참여보다는 규제에 초점이 맞추고 있다. 노동부는 안전수칙을 반복적으로 위반한 노동자에 대한 제재 사유와 절차 등을 담은 ‘표준 안전보건관리규정’을 내년까지 마련한다. 기업이 취업규칙을 작성할 때 노동자 안전수칙 준수 여부에 따라 포상과 제재가 가능하도록 지도할 예정이다. 노동자의 작업중지권과 관련한 매뉴얼도 만든다. 작업중지의 구체적 범위와 요건 등이 담길 예정이다.

노동계 “사용자 솜방망이 처벌 지향”
재계 “또 하나의 규제만 생겨”

노동계는 이번 로드맵이 기업에 대한 처벌과 감독을 느슨하게 풀고, 노동자에 대한 통제만 강화하는 대책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위험성평가에 노동자 참여를 담보할 제도적 장치가 부족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노동부는 위험성평가에 노사 참여를 강조했지만 실질적인 조치로는 ‘작업 전 안전점검회의’ 강화만 언급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하청노동자 공정에 대한 원청의 위험성평가 실시 의무나 하청노동자 참여방안 등이 세부적으로 마련돼야 한다”며 “특히 2024년부터 50명 미만 사업장에도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는 만큼 위험성평가 의무화도 앞당겨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위험성평가를 중대재해처벌법 수사자료에 적시해 재판에서 고려하도록 한다는 점도 자칫 기업에 면죄부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노총은 “의무사항인 위험성평가를 마치 대단한 노력을 한 것처럼 포장해 정부가 수사 봐주기로 솜방망이 처벌을 지향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은 “안전인증 기업에 중대재해 처벌 수준을 감경하는 방안과 동일한 취지”라고 비판했다.

특히 정기감독을 위험성평가 점검으로 전환하는 것은 정부의 ‘감독 포기’나 다름없다는 목소리가 크다. 한국노총은 “기업의 자율적인 산재예방을 위해서는 더 방대하고 세세한 규정들이 필요한데 거꾸로 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민주노총도 “안전보건규칙은 산업안전보건법 38조(안전조치)와 39조(보건조치)의 실질적 내용으로 각 조항 전체가 위반시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며 “이를 처벌과 예방 규정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처벌 규정을 대폭 축소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계는 위험성평가 의무화 등 로드맵의 조치가 새로운 처벌과 규제 요소가 될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한국경총은 “위험성 평가의 의무화는 기존 산업안전보건법과의 중복 규제 정비와 자의적 법집행 방지를 위한 명확한 기준 등이 전제되지 않으면 또 다른 규제에 불과할 뿐 실효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중대재해처벌법과 산업안전보건법의 강한 처벌 규정은 그대로 둔 채, 위험성평가의 의무화를 통한 새로운 처벌 규정을 마련하는 것은 오히려 노동 규제를 강화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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