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노동뉴스 자료사진
▲ 매일노동뉴스 자료사진

2001년 1월20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철도구조개혁법을 마련해 연내 철도 민영화를 이루라고 지시한다. 철도청 운영적자가 명분이었다. 규모가 크긴 했다. 적자는 1998년 3천212억원, 1999년 2천510억원, 2000년 2천500억원이다. 김 전 대통령은 건설교통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어느 나라도 철도가 국영화된 나라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해 2월 건교부는 철도산업구조개혁기본법안을 입법예고했다. 6개월여의 검토 끝에 정부는 8월 기본법안 최종안을 내놓고 국회에 상정하기로 했다.

한국전력공사 민영화 논의도 마찬가지다. 2000년 기준 한전은 자산 규모 49조원, 총부채 34조원으로 부채비율이 높다는 비난에 휩싸인다. 이미 김영삼 대통령 시절부터 민영화를 추진해 온 정부는 김대중 대통령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 입장을 폈다. 한전 민영화는 1단계 발전 자회사 분할 및 국내외 매각, 2단계 송전 민영화, 3단계 배전망 민영화로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9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한 공공부문 민영화 바람은 이들에 그치지 않았다. 한국통신 같은 기간산업들이 숱하게 민영화 대상이 됐다. 한국가스공사도 마찬가지다. 2001년 정부는 한국가스공사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가스 도입부문 업무를 3개사로 분할하고 2개사를 매각하는 법안을 냈다.

민영화 광풍의 마지막 저항선은 노조였다. 당시 노조는 부문별로 민영화 저지를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철도를 민영화해도 부채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공공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2001년 오건호 당시 민주노총 정책부장은 철도청 적자의 배경은 정부의 지원 부재와 비현실적인 요금이라고 짚으면서 민영화하면 철도망의 공공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고용불안을 초래한다고 비판했다.

노조는 곳곳에서 이기고 또 졌다. 정부가 내놓은 경쟁과 효율의 논리가 왜 공공부문에는 적합하지 않은지 다퉜다. 90년대부터 시작한 민영화가 2002년 벽두에 다시 논의되는 것 자체가 크고 작은 저지 투쟁의 결과다. 마침내 2002년 2월25일 철도·발전·가스 노동자가 파업을 했다. 38일간 이어진 민영화 저지 투쟁의 결과 철도청은 공사와 공단으로 분리됐지만 민간 매각은 비켜 갔다. 한국전력공사도 공기업화하고 발전 5사와 한국수력원자력으로 나뉘었지만 국내외 민간매각과 2·3단계 민영화 계획은 막았다. 한국가스공사는 공사체제를 유지했다. 그렇게 20년 전 민영화는 저지선을 넘지 못했다.

▲ 매일노동뉴스 자료사진
▲ 매일노동뉴스 자료사진

노골적 민영화 시도 중단한 성공 역사
경쟁도입·우회 도입 대응 못한 아쉬움

“당시를 직접 기억하는 이들이 현장에 많이 남지는 않았지만, 노골적인 민영화 시도를 중단시킨 성공의 역사로 기록한다. 그렇지만 이후 발생한 정부의 경쟁도입과 우회적인 민영화 시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이수범 공공운수노조 한국가스공사지부 정책국장은 이렇게 강조했다. 2002년 2월25일 이후 20년간 정부는 집요했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민영화를 추진했다. 이 기간은 노조에게는 어쩌면 ‘잃어버린 20년’이다.

2013년 시작한 수서고속철도(SRT) 민영화 시도는 노골적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시작한 SRT 설립은 제2공사 형태를 띠었지만 사실상의 민영화다. SRT 도입을 매듭지은 박근혜 정부는 “경쟁체제 도입”이라는 신조어(?)로 민영화 논란을 회피하려 했다. 김선욱 철도노조 정책실장은 “SRT는 현재는 공공기관이지만, 철도 민영화로 봐야 한다”며 “외국사례를 봐도 철도 같은 덩치가 큰 기간산업 민영화는 수익이 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분할하는 방식에서 시작해 전면적 민영화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현재 철도쪽 민영화에는 기상천외한 방법까지 동원되고 있다. 김선욱 실장은 “한 노선을 몇 킬로미터 단위로 쪼개 공사를 발주하고 운영권을 내어주는 방식”이라며 “이런 방식의 민영화를 막아 내기 위해 분할한 철도의 수평·상하 통합을 모두 염두에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발전쪽은 공기업이 민간기업으로 둔갑했다. 한전 자회사로 여전히 공기업으로 남은 발전 5사는 민간기업처럼 경쟁적으로 수익을 추구하면서 각종 문제를 야기했다. 가장 큰 문제가 비정규직 양산과 위험의 외주화다. 이른바 ‘김용균법’으로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을 이끈 고 김용균씨 사고를 비롯해 비정규직 산재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김용균씨 사고 이후 재공영화를 통한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논의가 시작했지만 더디다.

구준모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위원은 “재공영화가 절실하지만 단순히 한전과 발전 6개사를 재통합해 기존으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원칙을 바로 세워 재공영화하자는 것”이라며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보장하고, 지역과 유리된 채 진행하는 발전사업의 민주적 추진과 재생에너지 중점의 녹색에너지 전환을 관철하는 재공영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스쪽은 직접적인 민영화를 피했지만 시장에 민간기업 진출이 허용됐다. 천연가스 직수입이다. 한국가스공사는 매각을 면했지만, 정부는 천연가스 수입에 군침을 흘리던 기업들에 직수입을 허용하면서 사실상 에너지 부문 진출을 허용했다. 정부는 가스시장 경쟁을 도입해 계통한계가격(SMP), 즉 일종의 도매가격을 인하하고 연료사용 불확실성을 최소화한다는 명분을 만들었다. 이 결과 2005년 전체 수입량의 1.4%에 불과했던 민간의 액화천연가스(LNG) 직수입량은 2020년 22.4%로 증가했다. 재벌기업인 SK와 SG, 포스코, S-Oil 같은 민간기업과 발전 자회사인 한국중부발전이 LNG 직수입을 도맡고 있다. 이수범 국장은 “정부가 당초 주장했던 SMP 하락이나 안정적 수급 같은 효과는 미미하다”며 “민영화 길이 막히자 우회적으로 민간기업의 시장진출을 허용해 재벌 특혜시장을 형성한 셈”이라고 비판했다.

▲ 매일노동뉴스 자료사진
▲ 매일노동뉴스 자료사진

탄소 없는 ‘공공’ 교통·재생에너지 절실
산업 민영화한 가스부문은 고심 지속

노동계는 정부의 이런 ‘사실상의 민영화’ 경로를 내부적 민영화와 우회적 민영화를 통한 은밀한 민영화로 규정한다. 내부적 민영화는 공기업의 목표를 수익성에 두고 경영 관행을 민간기업처럼 만드는 방식이고, 우회적 민영화는 민간기업의 사업 진출을 허용해 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는 방안이다. 철도·발전·가스부문 산업은 이런 은밀한 민영화가 상당 부분 진척됐다.

2022년 2월 현재 3개 부문 노동자들은 다시 공공성 문제를 공론화하고 있다. 구준모 연구위원은 “20년 전 민영화 저지 투쟁은 큰 승리였고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정부와 자본,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 질서 속에 강력한 시도를 돌려세웠지만 은밀한 민영화 추진으로 비정규직을 활용한 비용절감 같은 부문에 선제대응을 하지 못한 결과를 뼈아프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반성과 성찰을 기반으로 노동운동이 공공성 확대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면서 또 한 번의 투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철도·발전·가스노동자의 새로운 전선은 기후위기다. 3개 부문 모두 기후위기에 따른 탄소중립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두고 정부와 공공성 문제를 다퉈야 한다.

철도는 탄소중립을 위한 내연기관차의 퇴출과 이에 따른 철도이용량 확대가 과제다. 김선욱 실장은 “기후위기에 선도적인 유럽연합(EU) 일부 국가는 일정거리 내 항공노선을 폐지하고 철도를 이용하도록 한다”며 “철도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탄소중립 교통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철도를 구석구석 부설하기 위해서는 사회공공성 측면의 접근이 필수적이라 수평·상하통합 논의가 절실하기 때문에 노조가 단체협약 같은 방식을 적극 활용해 주체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발전은 재생에너지 시장의 공공성 담보가 절실하다. 현재 정부는 민간투자 활성화를 바탕으로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끌어 올리는 시도를 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한국형 뉴딜이나 기업의 재생에너지 사용을 강조한 RE100 같은 기조 모두 민간기업의 재생에너지 발전과 사용이 중점이다. 구준모 연구위원은 “문재인 정부도 2050년 탄소중립의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민간에서 수행하는 것에 합의를 한 셈”이라며 “간헐성이 큰 재생에너지 특성상 발전설비 투자가 막대하게 필요하다는 현실적 문제를 고려해서라도 민간주도 재생에너지 시장 형성을 공공성 강화로 항로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스쪽은 조금 더 고민이 많다. 2030년까지 LNG를 활용한 화석연료의 과도기적 대체가 필요하지만 2050년까지 시계를 넓히면 LNG 역시 퇴출 대상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장은 민간기업의 시장 참여로 오히려 불확실성이 커진 LNG 수급의 안정성 강화를 강조할 수 있지만 5년이 흐른 뒤에는 새로운 노선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미 민간기업이 보유한 직수입 권한을 다시 회수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수범 국장은 사견을 전제로 “에너지 공급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 민간 직수입업자에게도 비축의무를 부과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며 “최근 맥쿼리 같은 해외자본에 민간 에너지 기업이 팔려 화제가 됐는데, 직수입 같은 도매뿐 아니라 소매 분야의 공공성 강화도 논의가 필요한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