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년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산업부터 전환이 시작됐다. 석탄화력발전소가 차례차례 문을 닫고, 내연기관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이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다. 이들 두 산업에서만 90만명의 고용충격이 예상된다.

정부가 ‘공정한 전환’이라고 번역하는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은 전환의 과정과 결과가 모두에게 정의로워야 한다는 개념이다. 정부는 올해 1조원 넘는 예산을 공정한 전환을 위해 사용하겠다며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해관계자들의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 ‘속도전’으로는 전환 과정에서 누구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정의’가 실현되기 어렵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거버넌스부터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공정한 노동전환’
올해 예산 1조원 어디에 쓰나?

2일 <매일노동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고용노동부를 비롯한 5개 부처(산업통상자원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중소벤처기업부·환경부)는 올해 ‘공정한 노동전환’ 사업에 총 1조385억원을 투입한다. 지난해 7월 발표된 ‘산업구조변화에 대응한 공정한 노동전환 지원방안’을 뼈대로 마련된 사업들을 뜯어보면 정부는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사업을 전개한다. 전직을 위한 직업훈련과 재취업을 위한 고용서비스 강화, 그리고 인프라 구축이다.

정부는 같은해 9월 기획재정부가 주관하고 노동부·산자부·중기부·금융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가 참여하는 ‘선제적 기업·노동전환 지원단’과 노동부 주관의 ‘노동전환 지원분과’를 구성해 사업을 추진해 왔다. 2020년 11월 문재인 대통령이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한 이후 반년 만에 탄소중립위원회가 설치되고, 그해 7월 정부의 공정한 노동전환 정책이 발표된 후 1조원 넘는 예산과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오상봉 한국노동연구원 사회정책연구본부장은 “정의로운 전환 정책이 우리나라의 경우 너무 급하게 추진된 측면이 없지 않다”며 “국제사회 압력이 커지면서 사실상 정부 주도로 노동전환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저간의 사정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정한 노동전환 사업으로 정부는 올해 △직무전환과 전직훈련에 2천58억원 △전직·재취업 고용서비스에 2천764억원 △디지털 역량 강화 4천808억원 △컨설팅 등 인프라 구축에 57억원 △고용안정선제대응패키지 사업 등에 698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노동전환 예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디지털 역량 강화 사업은 디지털 크레디트(5만5천명 대상), K디지털 트레이닝(2만9천명 대상)이 대표적이다. 디지털 크레디트 사업은 내일배움카드를 발급받은 청년 구직·재직자와 중장년 구직자를 대상으로 기초 코딩과 웹·애플리케이션·메타버스 개발 등 디지털 기초 직무역량 훈련이다. K디지털 트레이닝 역시 국민내일배움카드를 통해 훈련비를 지급하는 디지털 직무훈련 프로그램이다. 다만 네이버·삼성 같은 민간기업이 훈련과정을 설계·운영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들 사업은 이미 한국판 뉴딜 중 ‘휴먼뉴딜’ 핵심사업으로, 또 올해 청년일자리 주요 사업으로 ‘타이틀’만 바뀐 채 중복해서 발표된 바 있다.

그렇다 보니 1조원 넘는 예산에도 당장 산업전환으로 고용불안을 겪는 노동자들은 체감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남태섭 공공노련 정책실장은 “지난해부터 석탄화력발전소 폐쇄가 본격화되고 있는데 정부의 노동전환 사업은 피부에 와닿는 게 별로 없고 공허하게 느껴진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공정한 노동전환 사업’은 노사가 직무전환에 동의하면 직업훈련과 재취업 지원 같은 제반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이다. 남태섭 실장은 “정부의 노동전환 사업은 직무전환에 대한 기업 컨설팅과 노동자 교육훈련이 대부분인데 고용유지나 생계보장 같은 전제가 함께 있을 때 의미가 있다”며 “산업전환으로 당장 일자리를 잃고 실업급여를 받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직무전환 교육에 대한 수용성이 얼마나 생기겠냐”고 반문했다.

고용과 생계를 보장하는 장치가 있어야 직무전환이 성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정부는 거꾸로 생각한다. 산업구조 변화로 불안해진 고용시장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직업훈련을 주목한다. 새로운 일자리에 적합한 직무를 갖추지 못한 것을 원인으로 보고 직업훈련 과정을 발굴·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산업전환 과정에서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노동자에게 디지털 역량 같은 직업능력을 갖추도록 하면 노동이동과 고용유지가 활성화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다.
 

▲ 금속노조가 지난해 6월1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기후위기로 인한 산업전환 과정에 노동의 참여 보장을 요구하고, 이를 위한 입법 활동에 나설 것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금속노조가 지난해 6월1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기후위기로 인한 산업전환 과정에 노동의 참여 보장을 요구하고, 이를 위한 입법 활동에 나설 것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인적자원개발위원회가 뜬다? 재계가 쥐락펴락

그래서 최근 부상하는 곳이 지역인적자원개발위원회(RCS)와 산업별인적자원개발위원회(ICS)다. 인적자원개발위원회는 2017년 ‘산업계가 주도하는 현장 중심 인력 양성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사정 협의체다. 현재까지 지역별로 17곳, 산업별로 18곳이 설치됐다. 올해 노동부가 2만5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산업구조변화대응 등 특화훈련 사업’의 수행기관은 지역인적자원개발위원회다. 그동안 내일배움카드 훈련과정은 중앙(직업능력심사평가원)에서 연 2회 심사를 거쳐 확정했다. 총 951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특화훈련은 지역인적자원개발위원회가 지역 내 직업훈련이 필요한 산업과 직종을 발굴하고 훈련과정도 직접 심사한다. 훈련기관 인증평가제가 면제되고 훈련비도 국가직무능력표준(NCS) 단가의 130%가 지급된다.

지역인적자원개발위원회는 지역 노사정이 참여하는 거버넌스 형태다. 한국노총 지역본부가 노동자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대부분 사업은 사무국을 역할을 하는 지역 경총과 상공회의소가 주도한다.

내연기관 자동차산업에서 전직수요 분석과 직무전환·전직교육 같은 ‘노동전환 사업’은 지난해 7월 발족한 자동차산업 인적자원개발위원회가 맡았다. 자동차연구원과 자동차산업협회(완성차단체), 자동차산업협동조합(부품사단체) 등이 참여하고 있다. 발족 당시에는 노동자위원이 없다가 같은해 12월에서야 김준영 금속노련 사무처장이 합류했다. 금속노련 관계자는 “발족 당시 노동계 참여를 배제한 것에 문제를 제기했는데 지난해 말 사업보고를 할 때가 돼서야 노동자위원을 추천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며 “철강 등 다른 산업별 인적자원개발위원회도 연초와 연말에 형식적으로 회의를 여는 것 외에 별다른 활동이 없어 노동계의 참여가 제대로 보장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2017년 제정된 인적자원개발위원회 운영규정(고시)에 따르면 지역이든 산업별이든 인적자원개발위원회는 노동단체 참여를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세부 운영규정이 없고, 제대로 된 모니터링이 이뤄지지 않다 보니 형식적으로 운영되는 측면이 적지 않다.

전환 거버넌스를 둘러싼 복잡한 셈법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서는 거버넌스가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어떻게 구축할 것이냐로 모아진다.

현재 탄소중립위원회 공정전환분과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 기후위기와 산업·노동 전환 연구회 그리고 일자리위원회에서 관련한 논의를 하고 있다. 그런데 거버넌스 구축을 둘러싸고 이해관계자들의 심경은 복잡해 보인다. 일단 대통령직속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사노위와 탈탄소 정책의 컨트롤타워인 탄소중립위의 권한과 역할이 서로 얽혀 있다. 3월25일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탄소중립기본법) 시행을 앞두고 탄소중립위는 대대적인 개편을 예고한 상황이다. 두 위원회에 모두 불참하는 민주노총은 새 정부가 출범한 뒤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노정교섭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검토 중이다. 두 위원회에 모두 참여하는 한국노총은 여러 가지 고려할 사항이 많아 아직까지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재계는 “대화 필요성은 공감한다”면서도 대화 자체에 부담을 느끼는 상황이다. 강병렬 한국경총 보건환경팀장은 “정의로운 전환 과정에서 고용보장 요구가 나올 수 있는데 산업과 직종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갈등요인이 될 수 있다”며 “노사갈등이 심화하면 탄소중립을 추진하는 데 자칫 장애요소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거버넌스가 기존 노사정 3자 대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연구본부장은 “탈탄소 사회로 가는 산업전환이 지역사회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며 “노동 문제뿐만 아니라 기후·산업·지역 문제들도 함께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범사회적 대화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정희 본부장은 “무엇보다 심의·의결 절차를 가진 의사결정과 이행능력 확보가 중요하며, 국가 차원의 탄소중립 비전과 업종·지역 차원의 탈탄소 정책 사이의 피드백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탄소중립위가 다양성과 민주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개편한다면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사회적 기구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대화기구는 대선 이슈이기도 하다. 가장 먼저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가 “정의로운 전환을 산업전환 과정에서 국가의 핵심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며 대통령직속 정의로운 일자리위원회 설치를 공약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한국형 ‘정의로운 일자리 전환체계’를 마련하겠다”며 기획재정부 개편 과정에서 일자리 전환 컨트롤타워를 만들고, 일자리위원회를 일자리대전환위원회로 개편해 업종과 계층, 지역별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골고루 참여하게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나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는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거버넌스 구축보다는 디지털 인재 양성 같은 직무교육에 방점을 찍고 있다.

경사노위와 탄소중립위, 일자리위는 지난해 말부터 비공식 모임을 갖고 거버넌스 구축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선 이후 거버넌스 구축 논의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 자료사진 청와대
▲ 자료사진 청와대

산업전환 넘어 삶의 전환 필요하다

노동계가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산업전환 피해자가 아니라 기후정의를 촉구하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한재각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장은 “정의로운 전환운동은 추진하는 주체와 연대의 양상, 여러 조건에 따라 다양한 경로로 전개될 수 있다”며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노동자부터 기후위기에 영향을 받는 계층과 지역에 대한 요구, 더 나아가 기후일자리 같은 사회불평등을 완화하는 적극적인 조치까지도 이를 수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기후위기는 불평등한 착취구조가 자연파괴로 이어져 발생한 문제”라며 “사회 불평등의 전면적 해결을 추구하는 다양한 세력의 정치적 동맹인 기후정의동맹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자리 지키기 방식의 방어적 태도에서 사회불평등 해소라는 비전을 만들고,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환 역량’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논의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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