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왼쪽부터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에 출연한 성소수자 부모 정은애(58·공노총 소방노조 위원장)씨와 변규리 감독, 강선화(52·아시아나항공 승무원)씨. <정기훈 기자>

“부모가 이런 험한 세상을 보면, 자식한테 너 이런 데 나가지 말라고 할 것 같잖아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우리 아이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구나. 부모라도 나서서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의 엄마가 영화 <너에게 가는 길>에서 나지막이 읊은 대사다. 그는 자녀와 함께 참석한 퀴어축제에서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험한 말을 듣고는 ‘투사’가 됐다고 한다.

<너에게 가는 길>은 성소수자 의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에는 성소수자 엄마인 34년차 소방공무원 정은애(58)씨와 27년차 항공사 승무원 강선화(52)씨의 삶이 담담하게 펼쳐졌다. 정은애씨는 현직 소방노조 위원장이기도 하다. 정씨와 강씨는 각각 남성으로 성별을 바꾼 트랜스젠더 ‘한결’과 동성애자 아들 ‘예준’을 키우고 있다. 아이들이 커밍아웃한 뒤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각각 활동명 ‘나비’와 ‘비비안’으로 활동 중이다.

‘트랜스젠더’ 자녀의 엄마, 소방공무원 ‘나비’
동성애자 아들의 엄마, 승무원 ‘비비안’

<매일노동뉴스>는 지난 9일 서울 용산구 공노총 사무실에서 정씨와 강씨, 영화를 연출한 변규리 감독을 만났다. 두 엄마의 자녀들은 각각 5년 전과 4년 전 ‘커밍아웃’을 했다. 정씨는 한결이 어릴 적부터 어두운 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긴 머리를 좋아하지 않는 점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레즈비언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단다. 그런데 한결이가 부모모임에 함께 나가자고 한 뒤 성별을 바꾸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뒤로 성별 정정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정씨는 한결이 가슴 절제술을 받도록 도와줬다. 수술 이후 마취에서 깨어난 한결의 첫 마디는 ‘엄마 고마워’였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여성이라 성별 정정 신청이 필요했다.

법원의 문턱은 높았다. 서울가정법원에 신청했지만, 판사는 ‘외부성기 재건수술’을 받지 않았다며 거부했다. 전주지법 군산지원의 문을 다시 두드리고 나서야 성별 정정이 허락됐다. 이 과정에서 한결은 걱정이 많았다. “판사가 레즈비언으로 그냥 살라고 하면 어떡하지”라고 정씨에게 토로했다. 하지만 정씨는 “‘네가 뭔데 레즈비언으로 살라 말라야’라고 따질 것”이라며 농담을 던지며 어깨를 두드렸다.

강씨는 스물여섯 살 게이 아들 예준의 엄마다. 아들에게서 커밍아웃을 받자 애써 담담한 모습을 보이려 했지만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준은 5년 전 ‘나는 동성애자입니다’는 내용의 편지를 건네곤 집을 나갔다. 이후 이틀을 펑펑 울었다. 그러나 이내 예준의 고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예준의 앞날이 걱정됐다. 그때부터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가 됐다.

예준이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고백을 하자 받아들이려는 연습을 시작했다. 예준이 애인과 촬영한 사진을 보여줄 때 남편과의 과거 사진을 보여주면서 함께 웃었다. 예준은 애인과 함께 애인의 엄마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예준 남자친구의 엄마는 다시 아들이 예전으로 돌아오길 바랐지만, 그 역시 나중에는 부모모임에 참석했고 강씨 가족과 조우했다.
 

▲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앨라이’가 된 두 엄마, 든든한 버팀목
“성소수자 편견 후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영화 속 정씨와 강씨는 자녀들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그려졌다. 이른바 ‘앨라이(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사람)’인 것이다. 두 엄마에게 자녀의 성정체성보다 중요한 것은 ‘생존’ 문제였다. 그래서 영화 출연을 결심했다.

강씨는 “커밍아웃 받을 당시만 해도 누구한테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성소수자를 향한 편견이 가득했다”며 “부모 모임에 나가 보니 나랑 똑같은 존재인데 왜 편견을 가졌을까 후회했다”고 전했다. 아들에 대한 편견이 없어지니 성소수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

정씨도 “한결이 성정체성을 두고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 채 상처 주는 발언을 했다. 몰라서 그랬다”며 “자식을 통해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된 계기가 됐다. ‘커밍아웃’은 자식이 부모를 넓은 세계로 초대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식이 준 선물을 부모가 내팽개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부모와의 인연이 중요하지만, 자신의 삶을 포기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정씨는 “저에겐 한결이가 살아 있는 게 너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트랜스젠더의 숙명여대 입학 포기’ 보도에 신경안정제를 복용한 한결을 보면서 그는 울먹였다. 그는 만약 한결이 세상의 삐딱한 눈초리 속에 설사 삶을 포기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네 옆에 있어줄게’라고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두 엄마는 성소수자들이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고 입을 모았다. 강씨는 “부모도 개별적인 존재다. 자식은 알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자식이 죄책감을 가질 것은 아니다”며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알렸을 때 상처받는 것은 부모의 몫”이라고 잘라 말했다. 정씨 역시 “커밍아웃은 부모에게 ‘폭탄’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가 부서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죽을 만큼 힘들 때 말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모의 평온을 깨는 것을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조언이다.
 

▲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 이미지
▲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 이미지

두 엄마 “성소수자에 안전한 노동 시급”
“아들아, 차별금지법 반드시 통과시킬게”

이들은 성소수자들의 ‘노동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두 엄마는 성소수자들이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씨는 노조위원장으로, 강씨는 아시아나항공 일반직 노조 조합원으로 활동 중이다.

정씨는 “트랜스젠더는 수술비 수천만원을 벌기 위해 열악한 노동현장에 내몰린다”며 “정상적인 노동을 위해 ‘성중립 화장실’을 만드는 등 기본적인 생리현상을 참아야 하는 상황만은 없어야 하지 않겠나”고 꼬집었다. 강씨의 경우 예준을 통해 노조활동에 더 애착이 갔다고 한다. 그는 “아들이 커밍아웃한 뒤 자연스럽게 노조에 들어갔다. 소수노조지만 소중해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며 “이런 부분을 아들이 일깨워 줘서 고맙다”고 전했다.

하지만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다. 이 때문에 성별·장애·나이·성적지향성 등을 이유로 교육과 고용 등에서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하는 ‘차별금지법’이 하루빨리 제정돼야 한다고 두 엄마는 힘줘 말했다.

강씨는 항공보안법 제정을 예로 들었다. 그는 “예전엔 비행기 안에서 승객이 승무원을 폭행해도 법이 없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며 “그런데 올해 1월 법이 시행되면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억울함을 당했을 때 호소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호소했다. 정씨는 “전 국민의 대다수가 차별금지법을 찬성한다는 통계가 있다”며 “최소한 교육과 노동 분야만이라도 차별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냐”고 성토했다.

이들은 자녀들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안전한 사회를 꿈꾼다. 강씨는 “아들이 당당하게 게이임을 드러내고 취업했으면 좋겠다. 엄마가 차별금지법 반드시 통과시킬게”라며 웃었다. 정씨는 “성소수자들이 직장에서 성정체성을 숨기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한다. 안전하게 취업하도록 어른들이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혐오 의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는 변규리 감독 또한 커밍아웃만으로 끝나지 않는 성소수자들의 상황에 주목했다. 변 감독은 “성소수자들이 왜 일상 속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할 위치에 있는지를 다뤄 보고 싶었다”며 “한결은 성별 정정을 신청하면서 부모 동의를 받아야 했고, 예준도 동성커플의 관계를 계속 재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관객들에게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겠냐’며 제안해 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영화 촬영을 마친 뒤에도 한결과 예준의 엄마는 다시 세상 앞에 섰다. 두 엄마는 꾸준히 영화 상영회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 팬들로부터 응원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자녀들의 커밍아웃이 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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