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피고 안전보건공단은 원고 문길주에게 고용의 의사표시를 하라.”

안전보건공단이 근로자건강센터 노동자를 불법파견으로 사용했다는 광주지법 13민사부(재판장 송인경 부장판사) 판결의 주문 내용이다.<본지 2021년 9월3일자 6면 “광주근로자건강센터 노동자 ‘불법파견’ 소송 승소” 참조>

6일 송달된 판결문을 보니 공단은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근로자건강센터 업무를 지휘·명령했다. 업무 수행 방법과 절차, 우수사례 등을 담은 ‘업무수행가이드’를 제작해 배포했고, 종합평가에서 가이드 준수 정도를 평가했다.

전국 44개 센터(분소 21개 포함)가 동일한 운영구조를 갖고 있어 불법파견 후폭풍이 거셀 전망이다. 근로자건강센터 노동자는 50명 미만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 건강을 위해 일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이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업무방법부터 자료양식까지” 공단이 지휘·명령

원고 문길주 광주근로자센터 전 사무처장은 2013년 1월부터 공단과 위탁운영계약을 맺은 조선대 산학협력단에 소속돼 2020년 1월까지 일했다. 그는 위탁운영업체 변경 과정에서 사직했다. 같은해 공단을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전국 센터 운영기관은 공단에서 매년 종합평가를 받아 그 결과에 따라 다음 연도 사업비 예산을 차등지급 받는 등 상당한 정도의 구속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며 “업무수행가이드는 이러한 센터 업무와 관련해 단순히 참고용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히 자세하게 그 방법과 절차에 대해 정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업무수행가이드에 수록된 ‘기술자료’에는 업무에 필요한 센터 등록카드·진료의뢰서·상담신청서 양식이 첨부돼 있다.

고용노동부·공단·센터는 노무 제공자의 안전·건강 보호·증진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역할을 나눠 업무를 수행했다. 노동부 책임론이 불거지는 까닭이다.

법원은 2016년 1~2월께 경기도 부천·인천 소재 휴대전화 부품 생산 사업장 노동자 5명이 업무 중 메탄올 급성중독으로 실명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노동부가 근로자건강센터를 중독의심자 사전발견·조치를 위한 신고센터로 활용한 점과 2017년 11월 삼성중공업 크레인 붕괴사고 후에는 센터에 산재 트라우마 프로그램을 제공하도록 한 점을 근거로 봤다.

법원은 “전국 센터의 운영은 각 운영기관에 위탁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피고의 사업 범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며 “전국 센터 직원들은 공단 소속 센터 담당 직원과 하나의 작업집단으로 구성됐다고 볼 수 있고, 전국 센터 직원들은 공단의 센터 운영 사업에 실질적으로 편입됐다고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공단은 2018년부터 전국 센터가 함께 사용하는 통합전산시스템 ‘어울림’을 도입했다. 이를 통해 공지나 각종 자료, 공문 등을 공유하며 업무를 수행했다.

판결과 관련해 안전보건공단 관계자는 “공단 변호사와 판결 내용·취지 등을 검토하고 있어 입장을 밝히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밝혔다.

“근로자건강센터 노동자 중 73% 비정규직”

근로자건강센터는 고용노동부 고시(2020-19호)에 따라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증진’하기 위해 마련된 곳이지만 센터 안 노동자 4명 중 3명이 비정규직이다.

6일 공단에 따르면 근로자건강센터 종사 노동자는 318명이다. 이 중 의사(35명)를 제외한 직원 283명 중 비정규직은 73.85%인 209명이다. 고용안정성은 이전보다 악화됐다. 공단이 용역을 발주해 2018년 8월 발간된 연구보고서 ‘근로자건강센터 중장기 발전방안 마련을 위한 연구’에 따르면 비정규직 비율은 67.9%였다.

고용불안이 상시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공단에 따르면 근로자건강센터를 운영할 위탁기관을 3년 단위로 공모를 통해서 선정하고, 1년 단위로 위탁계약을 갱신하고 있다.

수탁기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1년 미만 단기계약을 하는 노동자도 여전히 있다. 공단은 “위탁기관과 근로자 사이 계약은 각 운영기관이 맺는데 2019년 정부 ‘민간위탁 노동자 근로조건 보호 가이드라인’에 따라 근로자 고용기간을 수탁기관·건강센터 계약기간과 동일하게 설정하도록 했다”면서도 “강제사항이 아니라 공단이 연간 2회 실시하는 근로조건 모니터링 평가항목으로 이를 준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길주 전 사무처장은 “이번 판결은 개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근로자건강센터 전체 노동자에 같은 지시를 내린 것”이라며 “판결에 따라 근로자건강센터 인력 모두를 정규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 전 사무처장의 경우 수탁기관이 바뀌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었다. 광주근로자건강센터의 새 수탁기관 근로복지공단 순천병원이 7년 동안 일해 온 그에게 고용을 위한 채용시험을 보길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근로자건강센터 정책 방향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은 “민간위탁으로 운영하려면 최대한 자율성을 가지고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하는데, 현재는 소규모 사업장이나 안전보건 사각지대 노동자들의 직업건강관리에 대한 전체적 조망없이 천편일률적 사후관리와 양적 성과지표 달성을 중심으로 지시하고 관리하는 상황”이라며 “근로자건강센터가 달성하고자 하는 청사진이나 정책철학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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