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진행된 노조게임 진행훈련 강좌에서 참가자들이 ‘노조마블’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 지난 4일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진행된 노조게임 진행훈련 강좌에서 참가자들이 ‘노조마블’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임금·단체협상을 앞두고 노조가 조합원 교육을 진행하고 사업장 선전사업을 강화했다. 그러자 사용자는 “경영난”을 호소한다. “회사가 몇 년간 계속 경영적자에 허덕이고 있으니 노조가 양보해 달라”는 것이다. 경험 많은 60대 조합원이 ‘연륜의 힘’을 이용해 술렁이는 조합원들을 다독인다. 그는 “사용자들은 예전부터 그런 말을 해 왔으니 무서워하지 마라”는 말로 여론을 다잡았다.

간신히 조합원 교육을 마친 노조는 노조 요구안을 확정하고 교섭위원들을 선출했다. 사용자는 이번엔 ‘조합원 차별’을 하기 시작한다. 승진인사에 노조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조합원이 많이 있는 부서는 성과급을 못 받을 것이란 소문도 돈다. 이번엔 노조가 사용자 전략에 ‘한 방’ 먹는다.

임단협을 해 본 사람이라면 낯설지 않은 풍경일 수도 있다. 임단협에서 ‘준비기-교섭기-투쟁기-마무리기’처럼 단계를 거칠 때마다 사용자들의 반응은 몇 가지 시나리오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노조는 이를 ‘사용자 전략’이라고 부른다. 이에 따른 노조 대응 방안도 어느 정도 유형화돼 있다. 노조는 ‘내부고발자 제보, TV프로그램 출연, 현수막 대자보 부착’을 비롯한 전략으로 사용자에 맞선다.

이런 교섭·투쟁의 단계별 패턴과 사용자·노동자의 전략 패턴을 유형화해 보드게임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노조가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교육할 때 딱딱하게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보드게임으로 자연스럽게 교섭 과정을 익힐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민주노총이 이런 발상을 현실화했다. 민주노총은 게임을 통해 교섭과 투쟁을 조합원들이 쉽고 재미있게 경험하고 배울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의 보드게임 ‘노조마블’을 제작했다. 민주노총 간부 서너 명이 2019년부터 기획·제작을 시작해 세 번의 베타게임 수정을 거쳐 지난해 여름께 완제품을 내놓았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4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열린 ‘노조게임 진행훈련’을 참관하고 노조마블 게임 진행 과정을 지켜봤다. 노조게임 진행훈련에는 민주노총 소속 노조간부 20명가량이 참여했다. 이들은 “노조마블 게임을 현장 조합원 교육시간에 활용하기 위해 진행훈련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왕튼튼’ ‘천사표’ ‘바빠요’
조합원 특징 부여한 8개 캐릭터 설정

노조마블은 8명의 게임 참여자들이 사용자의 공세에 맞서 가며 임단협 과정을 단계별로 거치는 게임이다. 각 단계를 거치면서 부여되는 사용자 말을 모두 제거하면 참여자들이 이긴다. 참여자들이 서로 경쟁하는 게임이 아니라, 8명의 참여자 모두가 한편이 돼 사용자의 공세에 맞서는 형식의 게임인 만큼, 개임을 하는 동안 참여자들은 같은 목표를 갖고 마음을 모으게 되는 효과가 있다. 보드게임판에 제시된 임단협 과정은 크게 4단계(준비기-교섭기-투쟁기-마무리기)로 나뉘어 있다. 4단계는 또다시 세부적인 15단계(준비단위 구성-조합원 교육-요구안 확정-단체협약 요구-상견례-실무교섭 등)로 나뉜다.

임단협을 조합원들이 친숙하게 느끼도록 하겠다는 것이 게임의 취지인 만큼 ‘노조마블’에는 노사관계 축소판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생생한 현장 모습이 담겼다. 우선 게임 참여자 8명이 맡게 될 캐릭터를 보자. 민주노총 캐릭터 ‘민총이’ 모습에 8가지 다른 특징을 부여한 이 캐릭터들의 이름은 각각 ‘나몰라’ ‘금수저’ ‘천사표’ ‘바빠요’ ‘어훈장’ ‘도딴지’ ‘소식통’ ‘왕튼튼’이다. 노조 안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조합원들의 모습을 8개 캐릭터로 정리한 것인데, 주변에서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캐릭터다.

가령 ‘왕튼튼’은 전 직장에서 노조간부 활동을 하다가 해고된 뒤 들어온 50대 초반 남성 조합원이다. 투쟁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한다. 성격 특성에 맞게 ‘쟁의’를 전문으로 담당하고 있다. ‘나몰라’는 사람 좋고 술 좋아하는 60대 초반 조합원이다. 사람들과 두루 친하고 성격이 좋기로 정평이 난 그는 ‘조직’을 전문으로 담당하고 있다. ‘천사표’는 늘 헌신적으로 조합원들을 대해 신망이 두터운 50대 초반 조합원이다. 과격한 투쟁 방식에 다소 거부감을 느끼고 있어서인지 ‘왕튼튼’과는 친하지 않다. ‘소식통’은 늘 새 소식을 전파하는 20대 조합원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파워 유저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며 권위적인 사람을 싫어한다. ‘왕튼튼’과 사이가 좋지 않고 ‘선전’을 전문능력으로 보유하고 있다.

임단협의 각 단계·과정을 거칠 때마다 노동자카드·사용자카드를 통해 제시되는 노동자 전술·사용자 전술도 현장감 있는 사례들로 구성됐다. 플레이어들이 사용자의 “경영난 호소”를 무력화한 뒤 노조 요구안을 확정하고 교섭위원까지 선출했더니, 이번엔 사용자가 ‘조합원 차별’을 하는 식이다. 실제 이날 게임에 참여한 플레이어들은 우여곡절을 거쳐 2단계 교섭기로 접어들어 사측과 상견례를 했는데, 이 단계에서 사용자는 ‘노조혐오 발언’을 했다. 사용자카드를 뒤집어 보니 “관리자와 비조합원들이 ‘민노충, 빨갱이, 폭력집단’ 같이 노조를 혐오하는 말을 하고 다닌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충격적인 발언을 들은 플레이어들은 페널티로 해당 1턴(8명이 한 번씩 카드를 내는) 동안 정책카드를 사용할 수 없었다.

3단계 ‘투쟁기’로 접어들었을 때도 만만치 않았다. 조합원들이 조정신청서를 제출했다는 공문을 사측에 발송하자, 사용자가 이번엔 ‘업무방해 고소’ 전략을 사용했다. 사용자카드에 제시된 내용에 따르면 노조는 “답답한 마음에 회사 총무실에 찾아가 큰소리 몇 번 질렀을 뿐인데 (사측이) 조합원 일부를 업무방해로 고소했다”고 항변했다. 민주노총 변호사와 상의하니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하지만 조합원들은 술렁였다. 모든 플레이어들은 노동자카드를 1장씩 회수당했다. 같은 단계 ‘조정기간’ 과정에 들어가 노조가 다양한 단체행동을 전개하자 사용자는 이번엔 ‘사적접촉’ 전략을 활용했다. 이 단계에서 뒤집은 사용자카드엔 “조합원이 모처럼 동네친구들과 술자리에 왔는데 예상치 못하게 회사 임원이 앉아 있었다”며 “조합원은 즐거운 술자리인 줄 알았더니, (회사 임원은) 노조는 요즘 뭐하냐, 분위기는 어떻냐고 묻는다”고 적혀 있다. 사용자의 이 전략으로 조합원 간 불신이 생겨 1턴 동안 플레이어들은 카드 교환행위를 할 수 없게 됐다.

게임 규칙을 익히느라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던 게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빨라지고 열기가 더해졌다. 20개가 넘을 때도 있었던 사용자 말이 5개 안팎으로 줄어들었을 정도로 노사의 승패 예측 선은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갔다. 이 기세대로 파업까지 하면 사용자 말을 다 없앨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순간, “자, 이제 시간이 다 됐습니다”는 말이 들려왔다. 점심시간이 돼 교육시간이 종료된 것이다. 2시간가량이면 끝낼 수 있는 게임으로 설계됐지만, 실제로 게임을 해 보니 규칙을 익히는 데 시간이 다소 필요했다.

▲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교섭 과정 쉽게 이해하고 협동심 늘어”
“규칙 익히는 데 시간 걸린다는 아쉬움도”

게임에 참여해 본 사람들의 소감은 어떨까.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30대 조합원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평을 내놓았다. 30대 중반의 참가자 이아무개씨는 “교섭을 할 때 겪어야 했던 일을 게임으로 하니 이해가 쉬웠다”며 “게임에 함께 참가했던 분들과 협업을 하니까 협동심도 느는 것 같고 앞으로 뭔가를 하더라도 함께 헤쳐 나가면 단결된 힘으로 이겨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30대 초반 참가자인 고아무개씨는 “각각의 캐릭터마다 특화된 분야가 있고, 각자 특화 분야에 맞는 전략을 해당 캐릭터가 쓸 때 사용자에게 더 타격을 줄 수 있게 짜여 있더라”며 “조직 내에서 역할을 잘 맡기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다만 게임규칙이 조금 복잡하고 어렵다는 평도 나왔다. 60대 한 참석자는 “이 게임 하나를 위해 2~4시간씩 조합원을 데리고 교육하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면 나이 먹은 사람은 먹은 사람대로 어려워하고, 스마트폰의 빠른 게임을 해 왔던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대로 이걸 하려 할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이어 “이 게임은 단순 게임이 아니라서 게임의 취지와 의미를 설명해야 하니까 진행하는 사람이 준비를 굉장히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며 “할 때는 의미를 생각하기보다 게임 방식을 익히기에 급급했다”고 전했다. 50대 한 참석자도 “(오늘은 처음이라 그런지) 게임 규칙을 익히는 데 바빠 교육 내용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고아무개씨도 “보통의 보드게임보다 훨씬 복잡하게 짜여 있어서 실제로 할 땐 몇 개 규칙을 빼고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이아무개씨는 “오늘 처음 해 봐서인지 이기기에 급급했고 게임을 통해 전해 주고 싶었던 세부적인 교육 내용들은 여러 번 해 봐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처음엔 복잡하지만 여러 번 하다 보면 누구나 숙지 가능한 수준”이라고 힘을 실었다.

민주노총은 노조마블을 16개 산별노조와 16개 지역본부에 각 5세트씩 배부한 상태다. 민주노총 교육원도 50세트가량을 추가로 보유하고 있다. 이날 교육 진행자이자이자 노조마블 제작에도 참여했던 한상진 민주노총 대변인은 “이 게임이 현장에서 많이 활용되길 바란다”며 “민주노총은 노조마블을 모바일 게임으로도 만들어 보려고 고민 중에 있다”고 전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