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세영 조합원, 김순희 조합원, 이현정 회계감사, 박지윤 여성부장, 김진아 수석부지회장 <금속노조 KEC지회>

지난 1월 경북 구미 비메모리 반도체업체 KEC에서 생산직군 여성노동자 2명이 관리자 등급이 됐다. 지난해 창사 50년 만에 처음으로 생산직 여성노동자 2명이 관리자 등급으로 승급한 데 이어 두 번째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9년 9월 내린 남녀 간 임금·승진 차별에 대한 시정권고를 회사가 이행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금속노조 KEC지회 조합원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승급 대상은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던 지회 조합원이 아닌 교섭대표노조인 한국노총 소속 조합원이다. 견고한 유리천장에 균열을 가져온 것 자체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성차별 문제를 노조 간 차별로 대응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직장폐쇄와 파업에 따른 손해배상 301억원 청구, 두 차례 정리해고와 친기업노조 설립. KEC 여성노동자들은 이러한 회사의 노조파괴에 맞서며 동시에 사업장 내 뿌리 깊은 성차별이라는 이중의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입사 때부터 ‘자연스레’ 행해진 차별에 “당연하지 않다”고 싸운 이들의 이야기를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5일 들었다.

30년 넘게 근속해도 깰 수 없는 유리천장
관리 주체는 ‘남성’ 관리 대상은 ‘여성’

1988년 입사한 이미옥(51)씨는 1999년 J2에서 J3로 승급된 뒤 22년간 J3에 머물러 있다. KEC 인사체계는 J등급(J1·J2·J3)과 S등급(S4·S5), 연봉대상자로 나뉘어 있다. 여성노동자와 남성노동자는 출발선부터 달랐다. 여성은 J1, 남성은 J2로 입사한다. 승진 속도도 차이가 났다. 2~3년 만에 승격되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7년이 되면 자동승격되는 제도에 따라 꼬박 7년이 걸렸다. 이씨도 7년 만에 J2를 달았다. 이마저도 지금은 사라진 상태다. J3 이상으로는 아예 올라가지 못한다.

“2004년, 2006년, 2008년 2년에 한번씩 인사고과 C를 받았습니다. ‘여성은 어차피 S로 못 올라가니 남성 대신 C를 받으라’는 분위기가 만연했어요. 사내 시스템을 통해 업무를 제안하고 아이디어를 인정받아 인센티브를 세 번 받았던 2006년에도 C를 받았습니다. 업무성과와 무관하게 여성을 승격하지 않으려고 인사고과를 일부러 낮게 주는 겁니다. J3 51호봉인데 S5 51호봉을 달았으면 기본급만 연 700만원 정도 차이가 납니다. 여러 수당을 계산하면 격차는 더 늘어나죠.”

미옥씨의 설명이다. 숫자로 드러나는 임금·승진 차별뿐만 아니라 KEC 사업장 내에는 전반적으로 차별적 문화가 관행처럼 자리 잡고 있다. 청소나 회의 준비 같은 잡다한 업무는 여성노동자 몫으로 돌아오지만 정작 회의나 워크숍 같은 ‘공적 업무’는 남성노동자만 참여할 수 있었다. 1997년 입사해 품질파트에서 완성품이 나가기 전에 검사하는 업무를 하는 김진아(42)씨는 회의 준비를 도맡아하면서도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관리 주체는 남성, 대상은 여성이었다. 김씨는 “부서별로 워크숍을 하는데 여성은 왜 참여를 안 시켜 주냐고 물어보면 ‘남아서 해야 할 일이 많지 않느냐’고 답했다”며 “직급에 상관없이 회의 준비는 여성이 하고 주도는 남성이 하면서, 회의가 끝나고 따로 설명을 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KEC 노사갈등은 2010년 임금·단체협상이 결렬되면서 촉발됐다. 지회가 파업을 하자 회사는 직장폐쇄로 맞불을 놨다. 직장폐쇄와 함께 2010년 6월30일 새벽 용역 600여명이 여성기숙사에 들이닥쳤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동생한테 전화가 왔어요. 시커먼 옷을 입은 남자 수백 명이 기숙사로 들어오고 있다고….” 미옥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당시 기억을 전했다. 여성노동자들은 잠옷차림으로 끌려나왔고 진압 과정에서 성추행도 벌어졌다.

기숙사 현장에 있던 노동자뿐만 아니라 바깥에 있던 노동자에게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노조활동에 불을 당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황미진(39) KEC지회장의 말이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딸들을 부모들이 믿고 맡긴 보금자리 같은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데 충격과 배신감이 컸습니다. 사실 파업 당시 ‘회사 사정이 정말 어려운가 보다. 그런데 파업을 해도 될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할 만큼 잘못한 것인지,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아야 겠다고 생각했죠.”

외주생산으로 고용불안 오나
“당연하지 않은 일들과 계속 싸울 것”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를 둘러싸고 시작된 노사갈등은 정리해고로 번졌다. 이때도 부부가 같이 근무하는 경우 해고의 칼날은 여성노동자를 향했다고 노동자들은 증언한다. 누적된 성차별 문제는 지회 투쟁 과정에서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임금·승진차별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데에는 2017년 첫 여성 지도부가 들어선 것이 영향을 미쳤다.

황 지회장은 “임금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노조가 모른 척한 측면이 있다”며 “고의로 그랬다기보다는 남성중심적 사회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여성 문제가 뒤로 밀렸던 것 같다. (우리 스스로도) 무지했던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지회에 따르면 회사는 창사 50주년 기념식에서 비전 2025 계획을 발표하며 전장 외주화를 공식화했다. 생산거점을 태국공장으로 이전하고 구미공장 전장라인은 축소한다는 것이다. 전력반도체 신제품을 생산하지 않는 데다 기술·시설투자가 이뤄지지 않는 것을 감안했을 때 외주화를 통해 국내공장을 비우고 팹리스(Fabless, 설계·개발 전문사)로 가는 수순이라고 지회는 보고 있다. 팹리스가 되면 구미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600여명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진다.

또다시 드리워질 구조조정 위협과 아직 해결되지 않은 성차별 문제에 이들의 전쟁은 계속된다.

“모든 일상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청소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고 여자랑 남자는 하는 일이 다르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않은’ 일들이었습니다. 성차별은 남녀 간 갈등이 아니라 사회구조에서 비롯한 불평등 문제예요. 회사는 남성 위주의 구조를 바꿔야 하고, 정부도 차별시정을 강제할 수 있도록 제도개선을 해야 합니다. 우리도 계속 싸울 거고요.”

황 지회장의 목소리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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