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인 제공 및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이재 기자

재난이 약자에게 더 가혹하다는 말은, 다시 말해 약자에 대한 차별과 격차가 이전보다 더 깊어졌다는 뜻이다. 신종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전 인류를 위협했지만, 사회적 재난은 여성에게 더 큰 상처를 남겼다. 노동시장에서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지위에 있던 여성이 더 심한 타격을 받았다.

돌봄과 대면서비스산업에 집중된 여성의 일자리가 먼저 사라졌고, 사회적 돌봄공백으로 여성노동자가 일을 포기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그렇다고 여성의 노동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외출을 자제하라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가정에서 이뤄지는 여성노동자의 무급노동 부담은 전보다 커졌다.

<매일노동뉴스>가 113주년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노동자의 ‘코로나19 생존기’를 전한다.

항공기 객실 청소노동자 김계월씨 이야기
“비행기 스케줄만 보는 회사에 ‘인간 권리’ 묻고 싶다”

김계월(58)씨는 코로나19로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코로나19 이전에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이·착륙하는 비행기의 객실을 청소하는 일을 했다.

“비행기 스케줄이 제일 중요했어요. 우리는 비행기가 내리고 뜨는 그 사이에 일을 하니깐 밥 먹는 시간도 비행기 스케줄에 따라 오락가락했어요. 한가할 때는 밥을 주고, 바쁘면 밥을 안 줘요. 인간권리보다 청소가 먼저였으니까요. 너무 배고플 땐 객실 청소하면서 승객이 버리고 간 초콜릿이며 남긴 빵을 주워 먹으면서 일했어요. 처음엔 창피했지만 배가 고프니 먹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멈추고 비행기 스케줄이 사라졌다. 계월씨는 지난해 5월 정리해고된 이후 거리에서 300일 가까이 농성을 하고 있다. 아시아나케이오는 고용유지지원금조차 신청하지 않고 계월씨와 그의 동료 8명을 정리해고 했다.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로 판정했지만 회사는 강제이행금 4천만원을 내고 국내 최대 로펌 변호사를 고용할지언정 ‘원직복직 하라’는 판정은 이행하지 않았다.

계월씨는 요즘 밤에 잠을 통 이루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파괴되었다고 느낀다. 계월씨는 자신과 같은 여성노동자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고 싶은 말은 하면서 살자”는 말이다.

“자기가 생각한 게 빨강색이면 빨강색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으니까 분홍색이라고 말하는 거야. 늘 부당하게 대우를 받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동료들을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입을 다물어요. 우리는 바보도 아니고 노예도 아니라고, 우리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을 해야 조금이라도 바뀌어요. 용기를 냈으면 해요.”

가사노동자 김재순씨 이야기
“분명 일은 했는데, 일한 사실을 증명할 길이 없다”

김재순(54)씨가 가정관리사가 된 것은 2006년 6월이다. 초등학생이 된 막내 아이를 학원으로 보내고 4년간 제과점에서 빵을 팔았는데 갑자기 근무시간이 오후 9시까지로 변경된 것이 가정관리사가 된 계기가 됐다. 처음부터 가정관리사가 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일자리 모집 공고를 보고 찾아갔어요. 그런데 그 일은 꽉 찼다고 하더라고요. 공고를 낸 곳이 안산여성노동자회였어요. 그때 보건복지부에서 막 시작한 산후 도우미 바우처 일을 제게 권하더라고요.”

산후 도우미 일을 2년 정도 하다가 가정관리사협회 안산지부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하는 가정관리사협회에서 상담과 알선 업무를 주로 하고 일손이 부족하면 직접 가정관리사 업무를 뛰기도 했다.

코로나19는 가사노동 시장도 크게 바꿔 놓았다. 연간 단위로 가사노동 업무를 위탁하는 연회원이 80여명에서 40명으로 절반 줄었다. 동시에 일거리가 줄면서 그만두는 가사노동자들도 크게 늘었다.

“가정관리사 대부분 40~60대 여성이에요. 일거리가 줄어서 그만두는 사람도 있지만 손주를 봐야 된다고 관두는 사람이 많았어요.” 여성에게 돌봄노동은 자신의 아이가 성인이 돼도 끝나지 않는 굴레다. 손자·손녀를 돌보는 일은 가정관리사에게는 단지 유급노동이 무급노동으로 바뀌는 것뿐, 노동의 강도나 시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

코로나19 이후 정부가 고용유지와 소득지원 정책을 쏟아 냈지만 가사노동자는 그 대상에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이후 70년간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노동자’였다. 코로나19는 그런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

“분명 일을 하고, 임금도 받았지만 그 사실을 증명할 길이 없더라고요. 임금을 현금으로 주는 경우가 많거든요. 전화로 호출하면 가서 일하는 방식이다 보니 출퇴근 기록도 없어요. 우리는 법에 없는 노동자잖아요.”

정부·여당이 ‘우선 처리’를 약속했던 2월 임시 국회에서도 가사노동자 고용 개선 등에 관한 법률은 한 줄도 논의되지 못했다. 미래는 여전히 막막하다.

누군가의 가정집을 찾아가 홀로 일하면서 겪은 부당함과 괴로움은 가족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오로지 같은 일을 하는 동료만이 그 심정을 안다. 재순씨가 가정관리사 일을 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의 나눴던 정이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모임이 제한되면서 그마저도 누릴 수 없는 사치가 됐다. “코로나19 이후 살이 좀 쪘어요. 스트레스를 못 풀어서 많이 괴로워요. 우리는 매달 소모임을 하고 산에도 가고, 수다도 떨면서 스트레스를 날려 버렸는데 그걸 못하니까 그만둔 회원들도 있어요.”

재순씨는 하루빨리 코로나19가 종식되고 가사노동자가 당당한 노동자로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학습지 교사 정난숙씨 이야기
엄마라서 선택한 일인데
지금은 ‘엄마’라서 포기해야 하는 일

정난숙(56)씨는 1993년 돌도 안 된 첫째를 두고 학습지 교사로 일을 시작했다. 결혼 전 사무직으로 일했지만 출산 이후 같은 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학원 취업도 고민했지만 육아 때문에 전일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학습지 교사다. 재택근무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에 바로 지원했다. 그런데 회사는 출근시간을 재고 점수를 매겼다. 첫 달 56만원을 벌었다. 많을 때는 한 달 150만원도 벌었다. 지금보다 오히려 처우가 좋았던 시절이다.

밖에서는 잘나가는 학습지 교사였지만 집에서 난숙씨는 괴로운 엄마였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저녁 9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시어머니가 함께 살며 육아를 도왔지만 그게 더 큰 어려움이 될 때가 많았다. 퇴근 후에 쌓인 집안일은 늘 난숙씨 몫이었다. 그는 “여성이 일하면 부수입 정도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컸다”며 “학습지 교사가 고소득 직종으로 분류되던 시절에는 ‘돈 많이 번다고 유세 떠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고 웃었다.

하지만 학습지 시장이 정체하면서 회사가 교사에게 돌아가는 수수료를 더 줄여 이윤을 높이는 방식을 쓰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코로나19 감염 확산은 학습지 교사를 사지로 내몰았다. 가뜩이나 유지가 어려웠던 고객들이 전염병 감염 우려를 이유로 학습지 구독을 중단했다. 학원처럼 학생들을 한 곳에 모아 가르치던 ‘러닝센터’는 5인 이상 집합 금지 조치로 문을 닫았다.

“회원 가정에 가 보면 안 그런 집인데 남성이 낮 시간에 집에서 쉬는 모습을 볼 때가 있어요. 그런 회원은 십중팔구 다음달 구독을 중지하더라고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대부분이 여성인 학습지 교사들은 코로나19로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홀로 남겨진 자신의 아이들을 책임져야 했다.

“어쩔 수 없이 학습지 교사 일은 그만뒀지만 집에서 노는 사람은 없어요. 집안일과 육아를 하면서도 생계를 부양해야 하니까 요새 택배 박스 조립하는 일을 하면서 아이를 돌보는 동료들이 많아요. 그렇지 않으면 요양보호사나 사회복지사 같은 시험을 준비하고요.”

난숙씨는 학습지산업노조 대교지부장이다. 그는 “여성노동자가 뭉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 낳고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막막하고 과연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러다 같은 직장 동료 선후배들과 소통하고 부당한 일에 함께 맞대응하면서 뭉쳤어요. 모임이든, 노조든 정당하게 일할 권리를 위해 연대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간호사 유연화씨 이야기
“병원에서 나는 아가씨가 아니다.”

올해로 9년차 간호사 유연화(30)씨에게 코로나19는 전쟁 같은 시간으로 기록됐다. 연화씨가 일하는 병원은 대구에 있다. 지난해 3월부터 5월까지 연화씨는 집에 가지 못했다. 병원에서 마련한 숙소에서 먹고 자는 일을 해결해야 했다. 숙소는 병원에서 1분 거리지만 예전보다 더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 퇴근했다. 레벨D 방호복을 입고 벗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방호복을 입으면 온통 땀범벅이 됐다. 환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야 했다. 체력적인 한계를 경험한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런 상황에서 감염병과 격리에 대한 환자들의 공포는 간호사에게 쏟아졌다. 식사가 늦으면 “이런 밥을 어떻게 먹냐”고 화를 내고, 환자 상태를 체크하는 의료기기를 간호사에게 집어 던지는 일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사실 코로나19 이전에도 그랬다.

“몇 년 전 70대 할아버지 환자가 저에게 ‘아가씨’라고 자꾸 부르길래 ‘저는 아가씨가 아니라 간호사입니다’하고 정중하게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50대 중반인 환자분의 아들이 저에게 ‘나이 많은 어르신이 아가씨라고 할 수도 있지, 왜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냐’고 호통을 치더라고요. 그게 제가 혼날 일인가요?” 그러면서 연화씨는 ‘간호사가 뭘 아냐’는 말을 들을 때는 자기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연화씨는 “코로나19로 좋아진 점도 있다”고 화제를 바꿨다. 코로나19로 마스크가 일상화되고 간호사들은 방호복을 입게 되면서 꾸밈노동의 부담이 크게 줄었다. 남성이 많은 의사세계에서 떡진 머리카락이나 덥수룩한 수염, 맨발에 슬리퍼 차림은 흠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과중한 노동’ ‘일에 대한 열정’ ‘개인적인 일보다 업무를 우선하는 적극성’으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이 대부분인 간호사 세계에서 헝클어진 머리 모양새나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 아주 편한 옷차림을 하면 십중팔구 불편한 시선을 받게 된다. 상급자나 환자·보호자에게 ‘어디 아픈 거 아니냐’ ‘자기관리도 못 하면서 누구를 간호하겠다는 것이냐’는 식의 지적이 뒤따른다.

연화씨는 “방호복을 입고 주변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경험했다”며 웃었다. “어차피 방호복을 입으면 땀이 쏟아지니 머리는 안 말려도 되고, 고글을 쓰니까 눈썹도 안 그려도 되고, 옷도 집에서 입는 것처럼 아주 편하게 다녔어요. 진정한 자유를 경험했죠.”

그러나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연화씨를 비롯한 간호사들은 지쳐 가고 있다. 간호사 사이에 번아웃(소진) 문제는 전염병만큼 빠르게 번지고 있다. 연화씨는 다른 여성노동자들에게 “포기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밥도 못 먹고 일하고, 아가씨 소리 들으면서 ‘병원은 원래 이런 곳’이라고 느끼며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 마음을 잘 알아요. 하지만 바꿀 수 있어요.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같이 바꿔 나가요. 그렇게 개선돼 왔고, 앞으로도 분명 개선될 겁니다.”

공동취재 : 김미영·이재·강예슬·정소희·임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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