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갑 노동부 장관과 세실리아 말름스트룀 EU 집행위원회 통상담당 집행위원이 지난 9일 오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한국의 ILO 핵심협약 비준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정기훈 기자>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해 "정부가 먼저 비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비준 절차 논쟁도 불이 붙었다. 대통령이 핵심협약을 비준할 때 사전에 국회 동의를 거쳐야 하는지 여부에 관한 것이다.

노동부 “국회 동의 없는 비준은 위헌” 주장

고용노동부는 17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들을 상대로 ‘ILO 핵심협약 비준 절차’ 설명회를 열었다. 노동부는 지금까지 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해 ‘선 입법 후 비준’ 방식을 고수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비롯한 관련법을 ILO 핵심협약과 충돌하지 않도록 개정한 뒤 비준하겠다는 논리다.

그런데 노동부는 이날 설명회에서 '비준 절차'를 다뤘다. 헌법에 근거해 국회가 먼저 동의한 뒤 대통령이 비준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헌법은 73조에서 대통령의 조약 체결·비준 권한을 명시하고 있다. 동법 60조에는 국회가 동의권을 갖는 조약·비준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이다.

노동부는 이를 근거로 “ILO 87호 협약 등 결사의 자유 협약은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이므로 대통령이 비준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동 협약과 상충하는 법 개정 내지 국회 비준 동의가 필요하다”고 해석했다. 대통령이 먼저 비준하고 국회에 비준동의안을 제출하는 방식은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대통령은 비준하고 국회는 동의 여부만 처리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위헌”이라고 말했다.

“비준권은 대통령에게, 동의권은 국회에”

하지만 노동부 주장처럼 대통령이 비준하기 전에 반드시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근거가 없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실제 헌법에도 대통령이 비준하기 전에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은 없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정부가 먼저 비준한 뒤 국회 동의로 넘어가게 됐을 때 국회 논의 과정이 지연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차후의 문제”라고 말했다. 각각 비준권과 동의권이 있는 정부와 국회가 각자 권리를 행사하면 된다는 얘기다.

법학자들도 비슷한 해석을 내놓는다. 박은정 인제대 교수(법학)는 “국제법과 국내법이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지, 반드시 국회 동의가 있어야 비준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은 헌법에 없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대통령이 정치적 혼란이나 부담을 감수한다면 (국회 동의 없는 비준을) 못할 것도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노동부 '선 비준 방식' 존재 인정, 목소리 커질 듯

선 비준 방식에 대해 “법체계와 맞지 않다”며 거론조차 하지 않던 노동부가 이날 설명회를 연 것은 이례적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노동계와 국가인권위원회가 선 비준을 주장한 만큼 정확한 설명이 필요했다”며 “노사가 먼저 합의한 다음 법을 개정해서 이행력을 담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선 비준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노동부가 공식 인정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도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노총은 “정부가 지금처럼 정부안이나 비준안도 만들지 않고 선 비준 불가방침을 말하는 것은 비겁한 변명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정부는 책임을 떠넘기거나 핑계를 찾지 말고 지금 당장 국무회의를 열어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송부해야 한다”며 “자기 책임은 하나도 하지 않고 국회 동의 핑계만 찾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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